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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원만 내면 때려도 되나요" 임신중 매맞은 엄마의 절규

중앙일보 2020.10.09 18:00

‘저는 살고 싶습니다. 저는 아이를 지키고 싶은 엄마입니다. 온 마음으로 간곡히 청원합니다.'

 
지난 8월 6일 20대 여성 A씨가 '가정폭력 처벌 강화를 간곡히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의 일부입니다. A씨가 가장 분노했던 부분은 가정폭력이 ‘가정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범죄에 비해 약하게 처벌되는 현실이었습니다.  
 
A씨는 올해 2월부터 사실혼 관계의 30대 남성으로부터 상습 폭행에 시달렸습니다. 지난 4월에는 임신 사실까지 알게 됐지만 동거남의 폭행은 A씨가 7월 26일 경찰에 신고 후 피신하기 전까지 계속됐습니다. A씨는 지난달 23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해자는 주먹이나 발로 때리는 건 물론 의자로 내려치는 등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으로 폭력을 가했고, 도망가려고 하면 결박하거나 목을 졸라 기절시키는 경우도 많았다”며 “저항할수록 구타가 심해지니 어느 순간부터 ‘그냥 이대로 죽는구나’ 하면서 바보처럼 맞았다”고 털어놨습니다.
  
112 신고 당시에도 동거남은 A씨의 목을 조르는 등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급한 상황은 신고 음성에도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개월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가해자에게 검찰이 지난 8월 24일 내린 처분은 '벌금 200만원'이었습니다.
 
변호사 상담을 통해 솜방망이 처벌이 나올 걸 예상한 A씨는 같은 달 6일 가정폭력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청와대 청원을 올렸습니다. A씨는 “처벌 강화가 내게도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보다는 법이 정말로 바뀌어서 나 같은 피해자가 더는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청원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가정폭력 처벌 강화를 호소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는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10% 밑도는 기소율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라는 지적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이달 2일 더불어민주당 이형석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만 봐도 2015년부터 2019년까지 가정폭력사범으로 검거된 인원 24만9366명 중 구속된 인원은 2334명입니다. 비율로 따지면 1%에 불과합니다. 가정폭력 재범률은 2016년 3.8%에서 2018년 9.2%까지 증가했습니다. 가정폭력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벼운 처벌이 문제로 지목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실정이죠.
 
A씨는 “길에서 모르는 사람 뺨을 때리거나 온라인에서 누군가를 익명으로 모욕만 해도 벌금 100만원 처분이 나오는데, 가정폭력은 서로 보호해야 할 사이에서, 홀몸도 아닌 임산부를 상대로 벌어졌어도 ‘가정의 일’이란 이유로 가볍게 처벌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를 아는 가해자는 ‘난 이제 벌금 200만원만 내면 된다’며 당당하게 굴고 있는데, 그럼 나는 벌금 200만원만 내면 막 때려도 되는 사람이냐”고 하소연했습니다.
 
검찰의 가정폭력사범 처분 결과

검찰의 가정폭력사범 처분 결과

 
실제로 가정폭력 범죄가 벌금형 이상으로 강하게 처벌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검찰이 매달 공개하는 ‘가정폭력사범 접수·처리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검찰이 처리한 가정폭력사범은 총 5만3243명입니다. 이 중 기소한 인원은 4997명으로 10%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기소했더라도 정식재판에 넘긴 경우는 3.5%(1844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약식재판(5.9%·3153명) 절차를 거쳐 벌금형으로 처리하거나 아예 기소하지 않거나(47.8%·2만5440명) 보호사건 송치(42.8%·2만2806명) 등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가정폭력 처벌이 유독 솜방망이인 이유는 가정폭력범죄에 우선 적용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에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조항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히거나 처벌을 희망하는 의사표시를 철회할 경우, 검사는 가해자를 형사처벌 대신 사회봉사·보호관찰·상담 등만 처분하는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하게 됩니다. 가정폭력처벌법의 입법 취지가 ‘가정의 평화와 안정 회복’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가해자를 처벌할지 말지에 대한 판단을 수사기관이 아닌 피해자에게 맡기고 있는 셈입니다.
 

가해자 지켜보는데 “사건 접수할 거냐”는 경찰  

A씨는 또 가정폭력 신고 시 피해자와 가해자 간 분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도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가정폭력처벌법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분리가 철저히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리되더라도 일시적인 조치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지적입니다.  
 
A씨는 “신고 당시 출동한 경찰관은 가해자와 나를 분리하지 않은 채 ‘사건을 접수할 거냐’고 물었다”며 “언제든 보복할 수 있는 가해자가 지켜보는데 사건 접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피해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파출소에서 진술을 마친 뒤에도 어떤 보호조치 없이 그냥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며 “가해자가 혹시 날 죽이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파출소 문을 나서기도 너무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사실 경찰은 가정폭력이 재발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일시적인 분리에서 나아가 ‘긴급임시조치’를 통해 가해자에게 접근금지 명령 등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폭력 검거 건수 5만277건 가운데 긴급임시조치가 집행된 건수는 3477건에 그쳤습니다. 이에 대해 한 경찰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경찰이 임시조치를 시행해도 이를 위반한 가해자에 대한 처분이 과태료 부과에 그치는 한계가 있었다”며 “위반 시 처벌을 강화하는 법 개정을 국회에 촉구하고, 임시조치 판단 요건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 집행 비율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가정폭력처벌법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난달 24일, 국회는 가정폭력 가해자가 접근금지 등 임시조치를 위반할 경우 징역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처벌 수위를 높이고 현행범 체포도 가능케 하는 내용의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가정폭력을 형사사건이 아닌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하는 법이 남아있는 한, 이번 개정안은 되레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은 “가정폭력범죄를 최종적으로 가볍게 처벌하는 법 조항이 그대로인 상황에서 중간 과정에 해당하는 임시조치 위반에 대한 처벌만 강화되면 경찰 대응은 오히려 더 소극적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허 조사관은 “검찰이 해야 할 처벌 여부 판단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처벌 불원 조항’과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를 폐지하는 게 가정폭력 근절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다”라고 했습니다. 현행범 체포가 가능해진 부분에 대해서도 “‘주 공격자를 우선 체포한다’ 등의 규정이 추가되지 않는다면 쌍방폭행으로 피해자까지 함께 체포됐다가 그냥 훈방 처리되는 식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스스로 모이기 시작한 가정폭력 피해자들

A씨는 가정폭력을 ‘가정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볍게 처벌하는 게 아니라 일반 폭행·상해죄와 같은 기준으로 처벌하는 법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내용을 담은 새로운 청와대 청원을 준비 중입니다. 또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가정폭력 피해자 10여명과 함께 피해 경험을 문서화하고 있습니다. 가정폭력 소송 관련 법적 조언을 공유하는 온라인 카페 및 유튜브 채널 개설도 준비 중입니다. 유튜브 운영으로 수익이 생긴다면 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폭력 피해자의 자립을 돕는 데 사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A씨는 “가정폭력 피해는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렵고 변호사를 선임하더라도 소송절차를 위해 준비할 것들이 너무 많다”며 “비록 우리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가정폭력 피해를 먼저 겪은 사람들로서 다른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과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ㅈㅂㅈㅇ(정보좀요)
'ㅈㅂㅈㅇ'는 시사 이슈를 접하다가 드는 의문점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지식형 영상' 시리즈입니다. 'ㅈㅂㅈㅇ'는 '정보좀요' 초성을 연결해 만들어진 신조어로 정보를 알려달라고 할 때 댓글란에 다는 표현입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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