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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애국과 친일, 이분법 넘어 극일의 잣대로 안익태를 보자”

중앙일보 2020.10.09 00:35 종합 21면 지면보기

안익태 친일 논란 재연 속에 만난 유족의 항변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가 1942년 9월 나치 치하의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지휘하는 장면. [중앙포토]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가 1942년 9월 나치 치하의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지휘하는 장면. [중앙포토]

7일 오후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을 찾았다.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1906~1965)의 묘소에 성묘한 조카 안경용(70)씨였다. 스페인 국적의 세 친딸을 빼면 생존자 가운데 안익태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자 실질적인 유족 대표다. 1977년 안익태의 유해가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봉환됐을 때 김포공항에서 국립묘지까지 영정사진을 들고 운구를 인도한 이도 안씨였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안씨는 최근 귀국해 2주 자가격리가 끝나자마자 묘소를 찾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원웅 광복회 회장이 논란 재점화
조카 안경용 “민족의식 투철” 항변
안익태 권위자 “만주국 연주회는
음악 계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큰아버지 안익태 선생(이하 경칭 생략)은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다. 10여 년 전부터 친일파 논란이 일 때 속이 많이 상했지만 외국에서 사업에 바쁜 데다 민주국가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지난 8·15 행사 때 광복회장이 불쑥 민족반역자에다 친나치로까지 몰아가니 참을 수가 없었다. 안익태의 친일 논란은 사실 학계에서 실증적 연구를 하는 분들 사이에선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진 이야기다. 그런데 뭔가 정치적 목적을 갖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말만 부각되고 그게 진실인 것처럼 퍼지고 있어 안타깝다. 반드시 큰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잘못 알려진 것들을 바로 잡을 생각이다.”
 
안씨는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안익태는 민족의식이 확고한 분이었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1950~60년대 안익태가 서울에 오면 반드시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여 고향 (평양)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1960년 그는 일본 공연 때 일본인 합창단원들에게 애국가를 한국어로 부르게 했다는 말씀을 하면서 감격스러워 했다. 도쿄 올림픽이 열린 1964년에는 ‘논개’란 작품을 만들어 일본에서 공연했는데, 그때도 재일교포들이 굉장히 많이 울었다고 했다. 평안도 사투리가 심한 그는 대화 중에 그냥 ‘일본사람’이라고 해도 될 말을 꼭 비칭(卑稱)으로 불렀다. 그런 사람이 민족반역 행위를 했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가 1942년 9월 나치 치하의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지휘하는 장면. [중앙포토]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가 1942년 9월 나치 치하의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지휘하는 장면. [중앙포토]

안씨의 이야기는 당시 공연을 관람했던 최서면(1928~2020) 국제한국연구원장이나 재일교포 바이올린 명장(名匠) 진창현 옹이 생전 기자에게 여러 차례 들려준 회고와 일치한다. 안씨는 “안익태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자랑은 아니지만 안익태의 다른 형제 중에 일본 유학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때 야스다(安田)란 일본식 성으로 학교에 등록했다. 하지만 안익태는 끝까지 안(Ahn)이란 성을 고수했다. 이것만 봐도 그의 민족의식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 ‘에키타이’란 일본 이름을 썼다고 비난하는데 그건 한자 이름(益泰)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뿐이고, 연주회 자료에는 ‘IkTai’‘EakTai’등 ‘익태’란 이름 그대로 사용한 예가 많다.”
 
뿐만 아니라 “조국 독립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밝힌 인터뷰 기사도 남아있다”고 안씨는 덧붙였다. 안익태는 1938년 아일랜드에서 ‘한국환상곡’의 유럽 초연을 마친 뒤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천만 동포들이 일본 치하에 있지만 독립을 위한 정치 투쟁이 매일 일어나고 있고 모든 조선인들이 가장 열망하듯이 나 역시 나의 조국이 곧 지금의 당신네 나라(아일랜드)처럼 독립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7일 현충원 안익태 묘소를 참배한 조카 안경용씨. 김상선 기자

7일 현충원 안익태 묘소를 참배한 조카 안경용씨. 김상선 기자

안경용씨는 “안중근·윤봉길 의사처럼 독립투쟁은 안 했지만 안익태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안익태의 이력 중에는 친일 내지 일제 협력 행위로 분류될 만한 행적이 기록으로 입증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2년 독일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자작곡 ‘만주환상곡’을 연주한 것이다. 당시 실황을 담은 7분여짜리 동영상이 2006년 한 독일 유학생에 의해 발견된 이래 ‘안익태=친일’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곳곳에 인용되고 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8·15 기념식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뒤 기자회견에서 재공개한 것도 같은 영상이다.
 
안익태의 두 얼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본연의 모습일까. 안익태 연구에 대한 권위자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는 20여년간 안익태의 행적을 추적해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여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학계의 노력으로 일본·미국·유럽에서 보낸 안익태의 어지간한 행적은 다 밝혀져 있다”며 “같은 일을 놓고 해석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라고 허 교수는 말했다.
 
안익태가 만주환상곡을 작곡해 일제에 부역했고 그걸 바탕으로 한국환상곡을 만들었다는 게 사실인가.
“순서가 반대다. 안익태가 한국환상곡을 처음 만든 것은 1937년이고 이후 여러 차례 개작(改作)했다. 만주환상곡에 같은 선율이 나오는 건 시대 상황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어떤 상황인가.
“1940년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추축국 동맹 결성 이후 더 이상 연주회에서 ‘한국’이란 명칭을 못 쓰고 애국가 합창도 못 하게 됐다. 당시의 정치 정세 때문이다. 안익태는 1941년 사실상 내용은 ‘한국환상곡’인데도 ‘교쿠토(極東의 일본식 발음)’란 이름으로 바꿔 연주했다. ‘도아(東亞)’란 곡도 마찬가지다. (안익태는 곡명은 바꿨지만 해설지에서 악상은 한국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만주환상곡으로 바뀐 것도 그런 연장선에서다. 이름뿐 아니라 악곡에서도 한국적 요소가 점점 사라져 간다. 민족의식과 일본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 사이에 있던 안익태의 고뇌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만주국 기념음악회에서의 연주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안익태에게는 연주 제의에 응하든가, 음악을 포기하든가 두 갈래 선택밖에 없었다. 원래 안익태의 출발점인 첼리스트로 계속 활동했다면 출연을 거부하고 다른 곳에서 연주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지휘자는 다르다. 지휘자에게 악기는 오케스트라인데 당시 유럽 전역의 오케스트라는 모두 국영이었다. 국가의 요구를 거부하면 음악을 할 곳이 없다는 얘기다. 안익태는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의 목표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계형’이라 말할 수 있다.”
 
김원웅 광복회장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친일을 넘어 안익태를 나치협력자로 비판하고 있다. 그런 주장의 가장 유력한 근거는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거가 없다는 반론이 연구자들에게서 제기되고 있다.
 
음악평론가 김승열씨 등의 연구에 따르면 제국음악원 회원은 당시 17만명, 그 가운데 비(非)아리아계 회원이 1024명이었다고 한다. 2007년에 발견된 안익태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는 “제국 영역 내 근로 허가를 부여함”이라고 기재돼 있다. 평론가 김씨는 “나치 독일의 판도 아래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허가증 같은 것에 불과하다”며 “안익태가 친나치 활동을 했다는 근거는 그 어느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안익태가 나치 협력으로 인해 2차대전 종전 후 프랑스가 ‘입국 기피 인물’로 분류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며 “안익태 연주회 기록 등으로 판단할 때 모두 사실에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들”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과연 안익태는 친일파인가 애국자인가. 우문(愚問)인 줄 알면서도 안익태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했다.
 
허영한 교수는 “최근의 친일 논란 자체가 정치적 개념이기 때문에 나 같은 음악학자가 판단할 일은 아니다”며 “다만 우선돼야 할 일은 안익태가 뭘 했는지를 객관적 자료로 밝히고 분석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김형석 안익태재단 연구위원장은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순응’과 ‘극일’의 개념으로 안익태를 평가하자고 주문한다. 민족 말살 정책이 펼쳐지던 일제 말기에 세계를 무대 삼아 음악으로 뜻을 펼치고자 했던 안익태에게는 식민 지배의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족 안경용씨의 의견도 일치한다. “안익태의 행적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다 해도 그건 적극적 의미의 친일과는 거리가 있고 ‘민족반역’ 행위는 더더욱 아니었다”고 김 위원장은 말한다. 대신 일본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음악적 성취를 이루고 일본 땅에서 일본 국영방송의 단원들에게 한국어 애국가를 부르게 함으로써 식민 통치의 설움을 일거에 풀어준 안익태의 행위야말로 진정한 ‘극일’이었다는 것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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