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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 이내, 볕뉘… 사진작가가 애타게 기다리는 찰나의 이름들

중앙일보 2020.10.08 05:00

우리말 찾기 여행⑧ 날씨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을 우리말로 '윤슬'이라 한다. 여름날 거제도 앞바다 풍경이다. 손민호 기자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을 우리말로 '윤슬'이라 한다. 여름날 거제도 앞바다 풍경이다. 손민호 기자

자연은 늘 아름답다. 하나 덜 아름다울 때가 있고,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해서 찾아갔다가 실망하는 경우는 대개 더 아름다울 때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행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애써 찾아간 공간이, 공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과 맞아떨어질 때 여행은 평생 잊기 힘든 추억을 남긴다. 삽시간의 황홀. 제주 중산간의 극적인 풍광을 카메라에 담다 간 사진작가 고(故) 김영갑이 남긴 말이다. 이 그림 같은 찰나를 어떻게 포착했느냐 물었더니 생전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다렸습니다. 한없이 기다렸습니다.” 사진작가가 애타게 기다리는 자연의 찰나에도 이름이 있다. 그것도 어여쁜 우리말 이름이 있다.  
 

이내  

스페인의 작은 마을 루고의 저녁 시간. 하늘은 아직 푸른데, 도시는 불이 들어왔다. 해가 진 뒤 하늘에 남은 푸른 기운을 우리말로 '이내'라 한다. 사진작가가 온종일 기다리는 마법의 시간이다. 손민호 기자

스페인의 작은 마을 루고의 저녁 시간. 하늘은 아직 푸른데, 도시는 불이 들어왔다. 해가 진 뒤 하늘에 남은 푸른 기운을 우리말로 '이내'라 한다. 사진작가가 온종일 기다리는 마법의 시간이다. 손민호 기자

일몰 사진을 찍을 때 주의사항이 있다. 해가 넘어갔다고 바로 철수하면 안 된다. 해가 진 직후 하늘이 가장 예쁜 순간이 열린다. 해는 없지만, 하늘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는 시간. 길어야 20분이 안 넘는, 낮과 밤이 교대하는 시간의 하늘을 ‘이내’라 한다. 오로지 이 순간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인데,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자어로 ‘남기(嵐氣)’라 한다. ‘남’ 자가 어렵다. 산에 서리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말한다. 
경기도 가평 쁘띠프랑스는 야경이 예쁘기로 유명하다. 이내가 든 시간을 맞추면 동화 같은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손민호 기자

경기도 가평 쁘띠프랑스는 야경이 예쁘기로 유명하다. 이내가 든 시간을 맞추면 동화 같은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손민호 기자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개와 늑대를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낮도 밤도 아닌 애매모호한 경계의 시간을 이른다. 시간대로 보면 이내와 겹치나, 뜻하는 바는 살짝 다르다. 영어로 ‘블루 아워(Blue Hour)’도 프랑스어 ‘l‘heure bleue’에서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블루 아워에 금발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고 믿는다. 금빛이 푸른 기운을 받아 도드라지기 때문일 테다. 도시의 은은한 야경도 이내와 잘 어울린다. 이내가 가시면 하늘은 비로소 검은색이 된다. 프랑스풍으로 늑대의 시간이 열린다.
 

윤슬  

달 뜬 밤에도 윤슬이 든다. 바다가 달빛으로 환해졌다. 백패커의 성지 인천 굴업도에서 촬영했다. [중앙포토]

달 뜬 밤에도 윤슬이 든다. 바다가 달빛으로 환해졌다. 백패커의 성지 인천 굴업도에서 촬영했다. [중앙포토]

물비늘이라고도 한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이른다. 화창한 한낮에도 볼 수 있고, 휘영청 달 뜬 밤에도 볼 수 있고, 해가 뜨거나 지는 어스름에도 만날 수 있다. 바다에도 드리우고, 강이나 호수에도 드리운다. 물결이 잔잔해야 윤슬이 더 잘 든다. 한낮에 윤슬이 들 때 물은 은빛을 띤다. 어스름에 윤슬이 들면 물은 금빛으로 번쩍인다. 하늘색이 한가지가 아닌 것처럼 물색도 하나가 아니다. 
해 질 녘에도 윤슬이 든다. 해 질 녘의 바다는 금빛으로 반짝인다. 일본 세토내해에서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해 질 녘에도 윤슬이 든다. 해 질 녘의 바다는 금빛으로 반짝인다. 일본 세토내해에서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볕뉘

나무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숲을 밝힌다. 이렇게 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볕뉘'라 한다. 아침 나절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다가 쵤영했다. 손민호 기자

나무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숲을 밝힌다. 이렇게 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볕뉘'라 한다. 아침 나절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다가 쵤영했다. 손민호 기자

이름에 뜻이 매겨져 있다. 볕이 누워 볕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을 말한다. 나무 울창한 숲에서 종종 볕뉘를 만났다. 해가 옆에서 비칠 때, 그러니까 오전이나 오후에 볕뉘가 자주 나타난다. 어쩌면 사진은 햇볕과의 숨바꼭질이다.   
 

상고대

상고대는 수목 따위에 내리는 서리다. 서리가 얼음인 것처럼 상고대도 얼음이다. 사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빙수에 들어간 얼음처럼 결이 있다. 한라산 정상 탐방로 밧줄을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상고대는 수목 따위에 내리는 서리다. 서리가 얼음인 것처럼 상고대도 얼음이다. 사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빙수에 들어간 얼음처럼 결이 있다. 한라산 정상 탐방로 밧줄을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순우리말이다. 한자어로 수빙(樹氷) 또는 수상(樹霜)이라 한다. 한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상고대는 수목에 내린 서리다. 서리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물체 표면에서 얼어붙은 것을 이른다. 얼음의 한 종류다. 상고대도 마찬가지로 얼음이다. 눈처럼 보이지만 얼음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눈꽃과 상고대를 분간하지 못한다. 눈이 안 내려도 상고대는 낀다. 공기가 얼 정도로 날만 추우면 되기 때문이다. 겨울 산행을 흔히 눈꽃 트레킹이라고 하는데, 실은 상고대 트레킹에 더 가깝다. 눈은 쌓이고, 상고대는 매달린다.  
상고대와 눈꽃이 있는 풍경. 한라산 구상나무에 상고대가 내렸고, 상고대 위로 눈이 내렸다. 눈은 쌓이고 상고대는 매달린다. 손민호 기자

상고대와 눈꽃이 있는 풍경. 한라산 구상나무에 상고대가 내렸고, 상고대 위로 눈이 내렸다. 눈은 쌓이고 상고대는 매달린다. 손민호 기자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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