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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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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2020년은 끔찍한 해”…얼굴 주름 깊어진 김정은

중앙일보 2020.10.08 00:32 종합 23면 지면보기

연말 김정은 리더십 위기 닥치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5일 평양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치국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봉주 국무위부위원장,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정은, 이병철 노동당 부위원장, 김덕훈 내각총리.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5일 평양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치국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봉주 국무위부위원장,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정은, 이병철 노동당 부위원장, 김덕훈 내각총리. [조선중앙통신]

요즘 김정은 얼굴엔 주름이 짙어졌다. 36살 청년 지도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5일 평양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정치국 회의를 주재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안색은 전례 없이 어두웠고 잔뜩 찡그린 표정이 관영 조선중앙TV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다. 이마 오른쪽엔 새롭게 주름살 하나가 깊이 패었다. 왼편에 자리한 이병철 노동당 부위원장, 오른쪽의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한껏 긴장하고 있는 장면도 포착됐다.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앞둔 시점이라 고무된 최고 지도부의 면면이 연출될 법도 한데 속 상황이 그렇지 못한 듯하다. 어디서 무엇이 단단히 꼬여버린 것일까.
  

미 대선 직전 김여정 방미설
트럼프 코로나 확진에 물거품
10일 당 창건 75주년 퍼레이드
“리더십 실패 보여 줄 광장”

“트럼프의 코로나19 확진에 가장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을 사람이 평양의 김정은일 것.”
 
비공개 탈북 고위 인사인 K씨는 김정은 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보낸 위로 전문을 이렇게 분석했다. 11월 미 대선에 파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대형 사건이나 이벤트를 의미하는 ‘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가 바로 트럼프의 코로나 확진이 돼버린 현실에 망연자실할지 모른다는 분석도 나온다. 평양과 워싱턴이 교감했을지 모를 모종의 사안은 물 건너가는 분위기란 측면에서다.
 
트럼프-김정은이 공동 연출을 맡은 미 대선 직전 깜짝쇼의 주역으로는 김여정이 캐스팅될 게 유력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모멘텀을 잃어버린 북·미 관계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여동생을 투입한다면 최고의 흥행을 거둘 수 있다. 김정은-트럼프 간 정상회담의 메신저로 백악관을 2년 전 방문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나 2000년 가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미 특사로 워싱턴을 찾아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만난 조명록 차수에 비할 바 아니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지난 7월 10일 대미 담화를 내면서 알 듯 말 듯 한 소리로 자신의 미국 방문 가능성을 암시했다. 김정은과 트럼프 사이의 인간적 신뢰가 두텁다는 점을 강조한 담화 말미에 뜬금없이 “미 독립기념일 축제를 잘 봤다. 그 장면을 담은 DVD를 꼭 얻고 싶다”고 말했다. 또 이런 사안에 대해 오빠인 김정은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점을 덧붙였다. 우회적인 표현을 동원했지만, 행간에는 노골적인 방미 희망 의사가 담겨있다.
  
정부, 북·미 중재 시도했나
 
김여정

김여정

문재인 정부가 미 대선 직전 김여정의 방미를 주선하려 했다는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최근 보도는 주변국 시선이 김여정의 행보에 쏠려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평양 당국이 띄운 ‘김여정 대미 특사 파견’ 카드에 문재인 대통령과 외교·안보 진용이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이미 북한으로부터 “오지랖 넓은 중재자”(지난해 4월)로 ‘공인’받은 상황이란 점에서다. 지난해 6월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을 주선한 듯 내세웠지만, 볼턴 회고록 등을 통해 구체적인 내막이 드러나 스타일을 구겼다. 그렇지만 대북 문제라면 지칠 줄 모르는 문 대통령과 정부가 ‘중재자’ 역할을 포기했을 것이라 믿긴 어렵다.
 
찜찜했던 국가정보원의 ‘김여정 위임 통치’ 언론플레이도 이런 연장 선상이란 해석이 나온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지난 8월 20일 국회 정보위 첫 보고에서 “김정은의 권한을 김여정이 일부 위임받아 통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칫 북한과 김정은을 자극한 소지가 다분한 ‘금기’ 발언을 쏟아내자 국회 안팎에선 어리둥절해 하는 반응이 나왔다. 정보위 소속 의원들이 ‘국정원 입장이 맞느냐. 그대로 발표해도 되는가’라고 확인할 정도였다. 일각에선 국정원 판단을 근거로 해 ‘김정은 리더십의 위기가 온 것’이라거나 ‘김여정이 후계자로 등장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왔다. 그런데 이런 국정원의 김여정 띄우기가 ‘방미 특사’ 행보에 뒷심을 실어주려는 ‘공작’이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발끈했어야 할 북한은 침묵했고, 공교롭게도 김여정은 두 달 넘게 공백을 보이다 이달 초 오빠를 수행하면서 외부 공개활동을 재개했다.
 
박지원 원장이 이끄는 국정원은 최고의 대북 악재 중 하나로 기록될뻔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북한 수역 내 피격 사망 건도 수완 좋게 처리했다. 문 대통령은 “내가 국정원장 하나는 정말 잘 뽑았어”라며 자신의 용인술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을지 모른다. 북측 앞바다로 떠내려간 우리 국민을 파도 속에 6시간 넘게 방치하다 총격 세례도 모자라 불까지 지른 북한 만행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대통령까지 꼼짝없이 규탄성 입장을 내야 했던 상황을 박 원장은 급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의 “대단히 미안” 언급이 담긴 노동당 통일전선부 명의의 대남통지문을 평양 측으로부터 받아내는 신공을 발휘한 것이다.
  
남북 정상 친서 ‘동상이몽’
 
박지원의 국정원이 아니었으면 문 대통령은 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 김정은에게 보낸 친서에서 “국무위원장님의 생명 존중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던 그다. 공무원 피격 사망을 뒤늦게나마 보고받고 아찔했을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의 ‘사과’에 무게를 한껏 싣는 친여 성향 인사와 논객, 관변 매체의 여론몰이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정은과 주고받은 친서 내용도 선제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언론 취재나 다른 루트로 그 내용이 알려질 경우의 후폭풍을 차단했다. 뜻밖의 인물이 국정원장에 발탁되자 고개를 갸웃하던 세인들은 이제야 ‘책사(策士) 박지원’의 쓰임새에 무릎을 치고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봄날을 다시 맞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지난달 초·중순 주고받은 문재인-김정은 친서는 두 정상 간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확인케 해준다. “서로 돕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 김정은이 “끔찍한 올해의 이 시간들이 속히 흘러가고…”라고 답한 건 대표적이다. 코로나19 관련 대북지원이나 협력을 강조하자 김정은 위원장이 ‘나 지금 엄청 힘들다’며 아닌 보살 하는 식의 응수를 한 셈이다.
 
문 대통령이 ‘국무위원장님’이라며 깍듯하게 호칭한 반면, 김정은의 경우 ‘문 대통령’ 수준에 그쳤다. 친서를 주고받는 채널은 있으면서도, 북한군의 총구 앞에서 황망하게 숨져간 국민의 생명을 구할 소통은 하지 않았다는 비판여론은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에게 두고두고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김여정 주도의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와 앙상블을 이루는 평양 남매의 만행은 남북관계에 대한 우리 국민 지지가 예전 같을 수 없음을 예고한다.
  
‘경제 실패’ 인정 입장서 돌변
 
김정은이 스스로 “끔찍하다”고 고백한 2020년도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올 초 이른바 ‘정면돌파전’을 내세우며 호기롭게 출발한 김정은의 북한은 코로나 창궐사태에 이어 집중호우와 태풍이란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스텝이 꼬였다. 대북제재의 고통 위에 겹쌓인 피로감은 김정은의 고민을 깊게 할 게 틀림없다. 미 대선 결과가 김정은이 바라는 쪽으로 향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경제와 외교는 물론 내치에서도 딱 부러진 조언을 해줄 미더운 후견인이나 측근도 찾기 어렵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기여했다는 최측근 이병철 당 부위원장과 박정천 총참모장에게 원수 칭호와 훈장을 주렁주렁 달아주는 세리머니를 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김정은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고 있는 가수 출신 현송월의 손짓 눈짓 하나에 어찌할 줄 몰라 하면서 자기 앉을 자리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노동당과 군부의 간부들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흥미로운 건 경제 실패를 스스로 인정했던 지난달 19일 노동당 전원회의 결정을 불과 한 달 보름 사이에 확 바꿔버린 대목이다. “계획됐던 국가 경제의 장성 목표들이 심히 미진되고 인민생활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했다”고 밝혔던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5일 정치국 회의에선 “(올해) 이룩한 승리와 성과에 도취돼 만세나 부르며 기세를 늦춰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내년 정초 8차 노동당 대회까지 80일 전투를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경제 실패 자인이 자칫 김정은 리더십 손상으로 이어질까 입장을 바꾼 기색이 역력하다.
 
‘승리자의 대축전으로 맞이하자’고 외쳐온 노동당 창건 75주(10월 10일)는 실패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광장이 될 판이다. 지금 김정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군사퍼레이드에 어떤 무기체계를 끌고 나갈지 정도를 결정하는 일일 것이다. 돌파구는 찾지 못하는데, 돌아갈 길도 마땅치 않은 딜레마다.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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