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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주시경 선생의 ‘말이 오르고 나라가 오르는 길’을 찾자

중앙일보 2020.10.08 00:24 종합 29면 지면보기
소강춘 국립국어원 원장

소강춘 국립국어원 원장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10월 9일 한글날 즈음이면 곧잘 인용되는 한힌샘 주시경(1876~1914) 선생의 말씀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언어 사용 실태를 돌아보면 선생께 부끄러울 지경이다. 말이 오른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말이 올라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다.
 

일부 계층의 전문용어, 소외 초래
소통 가로막지 않게 다듬어 써야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이웃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라 경덕왕 때는 인명·지명·관직명 등을 한자어로 바꾸는 정책을 추진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공식 문서에 한문을 사용했다.
 
1446년 반포된 한글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국문’이라 명명됐지만, 그마저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진 시련을 겪었다. 지금처럼 한글 전용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오랜 부침 속에서 아름다운 우리말들이 많이 사라져 안타깝다.
 
최근에는 영어를 비롯해 서구에서 온 어휘들이 우리 국어를 잠식하고 있다. 특히 이런 현상은 일상의 언어 표현과 어휘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파괴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물론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의 말과 문화를 풍부하게 하려는 시도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앞선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들어온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쓰는 행태는 경계해야 한다.
 
외국어는 그 말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간의 언어도 그러해야 하지만 특히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언어는 어려운 용어를 최대한 피해야 한다.
 
일부 계층만 사용하는 어려운 말이나 전문용어는 듣는 사람들이 소외당한다는 느낌이 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외래어와 신조어 사용 양상을 보면 사회 계층 간 의사소통 단절을 넘어 국민 분열을 초래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어 걱정스럽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다.
 
한문을 몰라도 배울 수 있고 뜻을 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세종대왕의 꿈이 담긴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말이 오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세상, 곧 서로를 배려하며 소통하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국립국어원은 국어 문화 향상을 위해 ‘신어 3일 대응’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말에 새로 유입되는 외래 용어가 자리를 잡기 전에 발 빠르게 포착해서 신속하게 대체 용어를 마련해 확산하기 위한 방안이다.
 
‘새말 모임’이란 이름으로 사회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언론 기사, 행정기관의 보도자료 등에 등장하는 어려운 외래 용어를 찾아낸다. 누리소통망 대화방에서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사흘 안에 대체 용어를 마련해 홍보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인포데믹’이라는 말은 악성 소문이나 왜곡된 정보가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을 일컫는 외래어다. 새말 모임은 이를 ‘악성 정보 확산’이라는 말로 다듬었다.  감염 질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감염자가 발생한 의료 기관을 통째로 봉쇄하는 ‘코호트 격리’를 ‘동일 집단 격리’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하고 타인에 대한 통제력이나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인 ‘가스라이팅’을 ‘심리(적) 지배’로 고쳤다.
 
불필요한 자원을 소비하지 않고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환경 운동인 ‘제로 웨이스트’를 ‘쓰레기 없애기’로 다듬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처음 알려지는 현상이나 문물은 외래어로 소개되기 쉽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는 익숙한 외래어이지만, 국민 대다수는 말뜻을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말일수록 모든 국민이 오해 없이 두루 사용할 수 있도록 쉽고 알기 쉬운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는 작업이 중요한 까닭이다. 그것이 말이 오르고 나라가 오르는 길이다.
 
소강춘 국립국어원 원장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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