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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법개정 반대했다고 탈락?"" …일본판 '블랙리스트' 파문

중앙일보 2020.10.06 07:00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가 정부 정책에 반대한 학자들을 일본학술회의 회원 임명에서 탈락시킨 일본판 '블랙리스트' 사건의 여파가 커지고 있다. 학술단체들은 반발 성명을 잇달아 발표하며 집단행동에 나섰다. 입헌민주당 등 야당들은 이 사안을 7~8일 열리는 국회에서 정식 의제로 다루겠다고 밝혔다. 
 

스가 정부, 일본학술회의 추천 학자 중 6명 임명 거부
탈락 학자 중엔 아베 '안보법제' 반대한 인물도 포함
"학문 자유 보장" "민주주의 위기" 학계 반발 이어져

지난달 16일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지난달 16일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독립성 보장' 원칙 어기고 개입 

지난 1일 아사히 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스가 총리가 일본학술회의 신규 회원을 임명하면서 이 단체가 추천한 후보 105명 중 6명을 임명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보도했다. 일본학술회의는 1949년 창립된 일본의 인문학·자연과학자들의 모임으로 학자의 입장에서 정부의 정책에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학자들의 국회'로 불리는 이 단체의 회원은 210명이고 임기는 6년이며 3년마다 절반씩 교체된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단체이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단체가 추천한 회원을 정부가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동안 연구단체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한다는 원칙 하에 추천된 학자들을 그대로 임명해왔다.
 
일본학술회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 [사진 홈페이지 캡처]

일본학술회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 [사진 홈페이지 캡처]

따라서 이번 임명 거부는 학계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임명을 거부한 6명의 학자 중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시절 추진된 안보법제 및 공모죄 입법 등에 반대한 인물들이 여럿 포함돼 있다. 스가 총리가 정부와 의견이 다른 학자들에게 불이익을 줘 '학자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학술단체들 연이어 성명 발표 

1일 정부 발표 후 일본학술회의는 강하게 반발하며 일부 학자들을 탈락시킨 이유를 밝히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원칙적으로는 정부에도 감독 권한이 있다"고만 설명하며 이들을 배제한 이유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그러자 학술단체들이 나섰다. 5일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연구자 약 4000명이 소속된 일본과학자회의는 3일 "학자, 연구자의 위기는 일본의 장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정부는 개입을 철회하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5일 스가 총리에게 해당 담화를 우편으로 보냈다. 
 
사립대 교원 등으로 구성된 '일본사대교련중앙집행위원회'도 성명을 통해 "일본의 학문이 (태평양) 전쟁에 동원된 것을 반성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일본학술회의"라며 "(이 단체는) 결코 권력자의 것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또 1983년 국회 심의에서 정부 측이 '정부의 임명은 요식행위일 뿐, 학술회의가 추천한 사람은 거부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스가 정부는 그동안의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또 대학원생들의 모임인 '전국 대학원생 협의회'도 "향후 학문을 이끌어갈 대학원생에게도 결코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항의문을 발표했다.
 
3일 일본 도쿄의 총리관저 앞에서는 300여명의 학자와 대학원생 등이 모여 "일본 민주주의의 위기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 등을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전국시민행동 등 시민단체들은 6일 오후에도 총리 관저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연다. 
 

"다른 의견 인정하지 않는 것이 독재"

이번 임명에서 배제된 학자 중 일부는 2015년 진행된 일본의 안보관련법 개정 당시 반대 의견을 냈던 이들이다. 일본 정부는 2015년 헌법 해석을 임의로 변경해 그동안 부인하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무력공격사태법 등 안보관련법을 제·개정해 2016년 3월부터 시행했다. 
지난 2015년 9월 14일 저녁 도쿄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시민들이 아베 정권의 안보법제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15년 9월 14일 저녁 도쿄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시민들이 아베 정권의 안보법제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이 법안은 제정 당시부터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일본 헌법 9조에 반한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도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당시 국회에 출석해 "이번 법안은 위헌이므로 즉시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오자와 류이치(小澤隆一) 도쿄지케이카이(東京慈惠會)의대 교수(헌법학)도 정부에 의해 탈락한 학자 중 한 명이다. 오자와 교수는 마이니치 신문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런 행동이 임명 거부의 근거가 됐다면 "학문의 자유에 대한 엄청난 침해"라면서 "다른 의견을 배제하는 것은 결국 독재이고, (일본 사회가) 독재를 향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여론은 학자들 편이다. 5일 민영방송 JNN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스가 총리의 이번 학술회의 회원 임명 거부에 대해 응답자의 51%가 "타당하지 않다"고 답했다. "타당하다"는 견해를 밝힌 답변자 비율은 24%에 그쳤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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