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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시시각각] 위정자가 되는 지름길

중앙일보 2020.10.06 00:42 종합 30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추석 연휴 기간 단꿀 같은 휴식과 함께 큰 울림과 긴 여운을 안겨준 이는 나훈아였다. 올곧게 한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만 허여된 내공과 카리스마가 어떤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노래는 물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도 예사롭지 않았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 걸었다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두 발 뻗고 잠들 국민의 권리보다
대통령의 안면 우선한 장관·참모
직무와 본분 망각한 엉터리 충성

오천년 역사에 그런 사람이 어찌 단 한 사람도 없었겠느냐마는 나의 마음은 이미 ‘좋아요’를 꾹 누르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시대는 나훈아의 말이 통하고도 남을 시점이다.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사건으로 우리 시대의 위정자, 나훈아의 표현대로라면 엉터리 정치인(僞政者)들의 민낯을 보고 말았으니.
 
공무원 피살사건은 뭐가 잘못됐다고 꼬집어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문제점과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총체적 부실이다. 정부의 행태는 소 잃은 농부가 소도둑 문책은커녕 외양간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뭐가 문제냐는 격이다. 대통령까지 나서 촉구한 공동수사는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허공을 떠돌고 있다. 사실 왜곡과 책임회피가 뒤섞여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통지문을 두고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치켜세운 결과가 그렇다. 충분히 예상되던 일이었다. 생각해 보라. 북한은 곧 당 창건 75주년 기념일을 맞는다. 대대적인 열병식으로 핵무력의 실체를 보여주겠다는 허장성세로 가득차 있는 김정은이 책임추궁으로 이어질 공동조사에 응할 리 만무하다. 대통령과 정부만 남북대화의 실마리라도 잡은 양 들떴을 뿐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대통령과 참모, 정부·군 관계자, 여권 정치인들의 언행은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중 딱 한 가지만 말하려고 한다. 대통령의 잠을 방해할 수 없었다는 참모와 장관들의 어이없는 ‘충성’에 대해서다.
 
논어 술이편에 발분망식(發憤忘食)이란 말이 나온다. 끼니마저 잊고 일에 열중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에게 그 대상은 학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 대상이 무엇일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매번 그러라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할 때면 끼니뿐 아니라 잠도 잊고 발분망침(發憤忘寢)해야 하는 게 ‘참 위정자(爲政者)’의 도리다.
 
나라 안팎이 돌아가는 일을 손바닥 보듯 하는 정보기관 수장, 병력 통솔권을 쥔 국방장관, 위기관리 사령탑인 안보실장, 대북 업무를 총괄하는 통일부 장관, 대통령의 분신이어야 할 비서실장이 그날 새벽 1시에 청와대에 모였다. 회의 소집 통보는 더 일찍 내려갔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면면들이 긴급회의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대통령이 알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게 정상적인 위기관리시스템이다. 그런데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조시대라면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난리가 났을 일이다. 실제로 보고가 이뤄진 시각은 아침 8시30분이었다. 간밤에 아무 일 없었던 날이나 무엇이 다른가. 국민이 무참한 죽음을 당한 현실에 참모와 장관들은 무덤덤했다는 이야기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대통령의 편안한 잠과 건강을 걱정했는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대통령에게 큰 누를 범하고 말았다. 대통령이 발문망침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고, 먼저 문책을 자청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랬다는 소식은 전혀 없다. 자신들의 본분과 직무에 대한 ‘인지감수성’이 집단적으로 희박하다는 것 말고는 달리 이유를 찾기 어렵다.
 
정작 그들이 걱정해야 했던 건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안면권(安眠權)이다. 국가가 나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준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국민은 발 뻗고 편히 잠들 수 있다. 대통령의 수면이 때로 방해를 받더라도 국민에게 믿음과 안심을 줘야 한다. 그게 뒤바뀌니 나훈아가 말한 위정자(僞政者) 소리를 듣게 된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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