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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정권으로 떠넘긴 '무늬만 재정준칙'…나랏빚 면죄부 줬다

중앙일보 2020.10.05 17:41
“현 정부의 재정 남용을 합리화한 조치에 불과하다.”(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5일 오후 세종시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추진 방안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이 5일 오후 세종시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추진 방안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5일 내놓은 재정준칙에 대한 평가다. 나랏빚 증가 속도를 관리하고 씀씀이를 줄이겠다고 만든 제도가 오히려 나랏돈 퍼붓기에 면죄부를 줬다.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 이내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외 규정을 폭넓게 두고, 도입 시기도 다음 정부 때인 2025년으로 미뤘다. 나랏빚 관리 의무를 현 정권 스스로 면제했다.
 

홍남기 “중장기 재정 여력 축적 필요”

기획재정부는 이날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방안’을 발표했다. 재정준칙은 나랏빚 폭주에 제동을 걸기 위한 제도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적자 비율 3%를 기준선으로 정했다. 이 기준치를 넘어서면 한도 이내로 다시 내려갈 수 있도록 재정 건전화 대책을 의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올해 말 정부 추산 국가채무비율은 43.9%로 사상 처음 40%를 넘긴다. 증가 속도도 가파르다. 정부의 중기재정전망에 따르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2년(51.2%)에 50%를 넘기고 2024년에는 58.6%가 된다. 현 상태로면 2045년에 99.6%까지 치솟을 수 있다. 재정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수치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가채무와 재정수지 악화를 고려할 때 재정 건전성 문제에 대한 대응은 중요한 어젠다”라고 말했다. 또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와 복지 성숙도 진전 등을 고려할 때 중장기적인 재정 건전성 관리와 재정 여력 축적이 긴요하다”고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다.  
 
연도별 국가채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연도별 국가채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경제위기, 재해 발생 때 한도 면제”   

문제는 빠져나갈 구멍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기재부 설계대로면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적자 비율 3% 수칙을 동시에 지키지 않아도 된다. 국가채무비율이 60% 아래면 통합재정수지적자 비율이 3%보다 높아도 준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반대로 재정 적자 비율이 3%보다 낮다면 채무 비율이 60% 웃돌아도 된다. 

 
안일환 기재부 2차관은 “해외 국가는 채무준칙과 수지준칙을 각각 개별적으로 적용하는데 한국은 하나의 지표가 기준치를 초과하더라도 다른 지표가 기준치를 하회하면 기준에 충족하도록 상호 보완적으로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헐거운 기준에 더해 예외규정도 광범위하다. 대규모 재해, 글로벌 경제위기, 전쟁 발생 시 한도 적용을 면제한다. 완화 요건도 있다. 경기가 둔화하고 있다고 판단할 경우 통합재정수지 적자 기준을 4%로 올린다. 잠재성장률, 고용‧생산지표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홍 부총리는 “심각한 국가적 재난·위기 시 재정 역할이 제약받지 않도록 한다는 기조 하에 검토했다”고 말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정부세종청사 기재부 브리핑실에서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추진 브리핑을 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재정의 역할 수행 등으로 국가채무와 재정수지 적자가 크게 증가됨에 따라 실효성 있는 재정 관리를 위한 재정준칙 도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뉴스1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정부세종청사 기재부 브리핑실에서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추진 브리핑을 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재정의 역할 수행 등으로 국가채무와 재정수지 적자가 크게 증가됨에 따라 실효성 있는 재정 관리를 위한 재정준칙 도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뉴스1

 
이런 예외‧완화 규정이 재정준칙의 실효성을 크게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창남 강남대 경제세무학과 교수는 “정부가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예외라고 인정할 수 있는 여지를 지나치게 크게 뒀다”며 “급증하는 나랏빚 증가세를 제어하려면 예외 조건을 훨씬 엄격하게 둬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준칙 적용은 차기 정권부터”

시행시기도 논란이다. 차기 정권인 2025년 회계연도부터다. “코로나19 상황이 여전히 지속하고 있고, 한도 준수를 위한 이행 기간이 필요한 점을 고려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김동원 전 교수는 “현 정부가 코로나19를 빌미로 채무비율 60%대까지 재정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확장 재정을 강조하며 재정준칙 도입을 반대한 여권의 시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여당은 적극적 재정에 족쇄 역할을 할 수 있는 재정준칙 도입에 반대해왔다. 이에 정부가 실효성 있는 재정준칙을 내놓기 어려울 거라는 관측이 나왔고,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 ‘면피용’이라는 지적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제시한 상한에 도달하면 적어도 해당 정부 임기 안에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 조항을 둬야 다음 정부에 부담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태가 없을 것”이라며 “책임이 없는 재정준칙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가계·기업·국가가 진 빚 5000조 육박.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가계·기업·국가가 진 빚 5000조 육박.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독일은 헌법에, 한국은 시행령에 규정

해외와 비교해도 ‘한국형 재정 준칙’은 헐겁다. 독일은 가장 엄격한 재정준칙을 가졌다. 부채 신규 발행을 GDP 대비 0.35% 이하로 억제하는데, 이를 헌법에 못 박았다. 프랑스는 재정준칙을 법률로 둔다. 구조적 재정적자(경기 순환과 관계없이 유지되는 적자)를 GDP의 0.5% 이내로 유지한다. 
 
이와 달리 한국은 채무비율 한도 등을 시행령으로 정하고 5년마다 재검토하기로 했다. 국회 심의나 의결 없이 정부가 국무회의를 통해 알아서 국가채무 비율 60%, 통합재정수지 적자 3% ‘룰’을 바꿀 수 있게 퇴로를 열어둔 것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행령에 한도를 규정하는 건 결국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고쳐 쓰겠다는 것”이라며 “정권이 손볼 수 없는 지속 가능한 원칙을 만들기 위해선 법에 채무비율 한도 등을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하남현‧임성빈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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