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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 이겨야 연차”···집단감염 구로 콜센터도 그랬다

중앙일보 2020.10.04 05:00
국내 한 대기업 직원 A씨는 최근 사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10여명의 팀원과 함께 회사로부터 자가격리 통보를 받았다. 그는 “공무상 부득이하게 밀접접촉자로 분류됐는데, 사측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연차를 사용하라’고 통보받았다”며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열악한 경영 사정으로 회사 분위기도 좋지 않은 데다 인사 등 불이익으로 돌아올까봐 제대로 말 한마디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직장인 26.4% “무급휴가면 아파도 회사 가야” 

지난 8월 24일 구로디지털단지역 환승센터에서 시민들이 출근길 버스를 오르내리고 있다. 뉴스1

지난 8월 24일 구로디지털단지역 환승센터에서 시민들이 출근길 버스를 오르내리고 있다. 뉴스1

코로나19가 국내에 상륙한 지 8개월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자가격리 시 개인 연차를 소진해야 하거나 의심증상이 있을 때도 휴가를 쓰지 못하는 등 직장 내 생활방역 조치가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콜센터의 경우 수 차례 집단감염이 발생한 전례가 있지만, 여전히 휴가 사용이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자 권익 대변을 구호로 내건 직장갑질119는 최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에게 "유급으로 병가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코로나19 예방, 종식에 중요한 지점"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7~10일 직장인 1000명을 상대로 연차·유급휴가 등 사용실태를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회사에서 자유롭게 연차휴가를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39.9%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3.6%는 아파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직장 분위기가 코로나19 확산에 영향을 미쳤는지 묻는 말에 ‘그렇다’고 응답했고, 26.4%는 휴가로 인해 급여가 차감될 경우 ‘아파도 출근한다’고 답했다.
 

콜센터 직원 "가위바위보 이겨야 휴가"

지난 3월 11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 120 경기도 콜센터에서 관계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소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월 11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 120 경기도 콜센터에서 관계자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소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같은 통계는 개별 사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자신을 콜센터 직원이라고 밝힌 직장인 B씨는 “매달 연차 신청을 하는데, 하루에 가능한 인원이 1명이라 원하는 날에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며 “연차를 사용하려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겨야 겨우 쓸 수 있고, 이겨도 회사가 요구하면 나와야 한다. 나오지 않을 경우는 페널티를 받는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 관계자는 “이미 집단감염이 발생한 서울 구로 콜센터의 경우도 (유사한 사례) 제보가 있었다”고 말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기준 전국 17개 콜센터 사업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코로나19에 감염된 근로자는 299명에 달한다. 특히 에이스손해보험 구로 콜센터의 경우 지난 3월 말까지 15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다. 민주노총은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올해 3월부터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고 실무협의를 진행해왔지만 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실적·성과와 휴게·휴가 연계 폐지를 지침화하고 이행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병가 쓰고 왔더니 “같이 일 못 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없을수록, 직장규모가 작을수록, 고용형태가 임시직일수록 연차 휴가 사용이 어려운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갑질119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없을수록, 직장규모가 작을수록, 고용형태가 임시직일수록 연차 휴가 사용이 어려운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갑질119

이 외에도 직장갑질119가 공개한 사례 중에는 “갑자기 몸이 아파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더니 대표가 '왜 출근을 안 하고 병가를 썼느냐. 해고하라'는 말을 했다. 병가가 끝나고 복귀하니 '아프면 일을 같이 못 한다'며 퇴사를 강요했다”는 직장인이 있었다. 또 “연차휴가를 사용할 정도로 일이 없는 것이냐”는 말을 듣거나 8년간 병가를 비롯한 연차를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는 직장인도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조치에 따른 유연·재택근무, 시차출퇴근제 등 적용도 더디다. 방역 당국이 공공기관 뿐 아니라 민간기업에도 이에 준하는 조치를 권고했지만 지난 8월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무실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나왔다. 지난달 28일 기준 부동산 중개업체인 강남구 디와이디벨롭먼트(11명), 강남구 신도벤처타워(16명), 영등포구 LG트윈타워(6명), 강남구 K보건사업(37명) 등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자가격리 때도 임금 70% 줘야" 

코로나19 전국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된 지난 9월 10일 대전 서구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들이 시민들을 차례로 검사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코로나19 전국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된 지난 9월 10일 대전 서구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들이 시민들을 차례로 검사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백승재 위더스HR노무법인 노무사는 “연차휴가는 근로자가 원하는 시기에 사용하는 것이고, 회사에서 연차 사용 결정을 강제하지 못한다”며 “회사 자체 판단으로 자가격리를 지킬 때는 임금 전액은 아니더라도 근로기준법 제46조에 따라 평균임금의 70% 이상은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노무사는 “감염법예방법 제41조의 2에 따라 근로자가 입원 또는 격리기간 동안 유급휴가(4인 가구 최대 123만원)를 줄 수도 있다”며 “그러나 이는 사업주의 선택사항이지 강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에 편지를 통해 “그간 저임금, 비정규, 특수고용, 중소 영세사업자 등 유급 병가제도 사용이 어려운 계층에는 건강보험에서 상병수당(상병급여) 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며 “관련 부처에 제도개선을 요청해 주시고 국회에도 관련 법의 개정을 요청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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