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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칼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잔인한 주식 랠리”

중앙일보 2020.09.30 00:29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주가 상승을 의미하는 랠리는 기분 좋은 단어다. 보통 크리스마스를 앞둔 산타 랠리, 여름 휴가를 앞둔 써머 랠리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최근의 주가 급등에 대해 미국 CNBC 방송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잔인한 랠리”라고 했다. 미 국민 90%가 사회적 격리와 봉쇄 등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는 반면 주식과 펀드를 보유한 상위 10%만이 엄청난 유동성에 힘입어 달콤한 랠리를 즐기기 때문이다. 월가도 사회적 약자의 희생에다 상대적 박탈감까지 의식해 “역사상 가장 미움받은 랠리”라고 인정한다. 코로나가 부른 비극이다.
 

코로나 사태로 무차별 현금 살포
자산 양극화로 약자만 고통받아
유동성 잔치…누가 설거지 할까
재정 지원, 사회 약자에 집중해야

미국 헤지펀드들이 주식을 무차별로 사들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코로나에 맞서 천문학적인 돈이 살포되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한 미국 경제의 손실액은 3조7000억 달러로 추산된다. 하지만 미 연준(Fed)과 트럼프 행정부가 쏟아붓는 돈은 무려 12조 달러. 이런 막대한 유동성에 자산 가격이 오르리라 보는 것이다. 그나마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서브 프라임 사태를 야기한 금융기관을 왜 혈세로 돕느냐”는 정치적 비난 때문에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침이 없다. 미 여야는 중국발 코로나 공포에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서로 돈 풀기에 혈안이다. 현금 중독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도 돈을 많이 풀었다. 코로나 이후 6개월간 140조원이나 쏟아부었다. 하지만 돈이 소비·투자 등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고 부동산·주식에 쏠리면서 자산 거품만 불렀다. 서울 아파트 실거래가는 현 정부 들어 45% 급등했고 개인투자자들은 빚을 내 주식을 사는 ‘빚투’에 빠져 있다. 이에 비해 코로나로 소비절벽에 부딪힌 자영업자·소상공인에겐 풍부한 유동성은 ‘딴 나라’ 이야기다. 올 2분기 도소매·숙박·음식점업의 대출은 18조8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사실상 빚에 기대 간신히 생존하는 형국이다. 극심한 ‘돈맥경화’로 한쪽은 유동성 폭우에, 다른 한쪽은 극심한 유동성 가뭄에 아우성치고 있다.
 
시장의 기능은 마비되고 있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무차별 현금 살포로 ‘좋은 상품을 골라내는’ 시장 기능이 작동 불능에 빠진 것이다. 이로 인해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돈이 넘쳐도 오히려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덩달아 통화 유통속도와 통화 승수는 사상 최저로 떨어져 유동성 함정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나마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간신히 유동성 함정에서 빠져나왔다. 마이너스 금리와 극단적 유동성 확대로 겨우 탈출했다. 하지만 한국은 외국자금 유출 공포와 국가 신용등급 때문에 이런 극약처방은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한·미 기준금리가 역전됐던 2005년 8월~2007년 8월 서울 증시에서 19조7000억원의 외국 자금이 빠져나갔다.
 
코로나 사태로 사회적 약자가 고통받을수록 더 많은 돈을 푸는 악순환이 끝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유동성 잔치가 끝나려면 두 가지 변수가 남아있다. 하나는 치료제와 백신 개발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바이러스로 인한 재앙인 만큼 금융·재정보다 의학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근본적 치유는 어렵다”고 말했다. 치료제에 힘입어 경제활동이 정상화돼야 과잉 유동성도 거둬들일 수 있다. 또 하나는 인플레이션 가능성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엄청난 유동성에도 생산성 향상과 중국산 저가품 덕분에 물가가 오르지 않았다. 반면 2004~2006년엔 소비자물가가 4%의 고공행진을 하자 미국은 기준 금리를 1%에서 5.25%까지 끌어올렸다. 역대급 인상이었다.
 
역사적으로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전 세계가 홍역을 앓았다. 1994년부터 미 기준 금리가 3% 포인트 오르자 중남미가 외환위기에 빠졌다. 2년 뒤에는 아시아마저 전염돼 외환위기를 겪었다. 2004년 금리 인상은 그린스펀 의장의 비대칭적 통화정책의 결정판이었다. 닷컴 버블 붕괴를 수습하느라 과도한 저금리를 유지하는 바람에 인플레와 주택거품을 일으켰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급속한 금리 인상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또 다른 파국을 낳았을 뿐이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 경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음식·도소매 업종, 청년·여성과 비정규직 등 가장 약한 고리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그 와중에 고통 분담은커녕 부동산은 급등하고 증시는 잔인한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언젠가 경기가 회복하겠지만 그 속도는 기대만큼 빠르지 않을 수 있다”며 “그때까지 많은 기업과 가계가 파괴될 것”이라 경고했다.
 
이제라도 재정 지원과 유동성 공급은 사회적 약자에 정교하게 맞추는 선택과 집중이 절실하다.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이나 통신비를 무차별 살포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이자 사치나 다름없다. 언제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돼 코로나 재앙이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제3차·제4차 재난지원금까지 각오해야 할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 있다. 넉넉해야 할 한가위가 어느 때보다 씁쓸하고 무겁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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