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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의 밀담] 민감한 북한 정보 공개, 정권 장단에 그때 그때 다른가

중앙일보 2020.09.30 00:19 종합 27면 지면보기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이다. 영국의 천재 수학자인 앨런 튜링은 갖은 고생 끝에 독일 에니그마의 암호를 깼다. 에니그마는 독일의 통신용 암호기였다. 그가 풀어낸 첫 암호는 독일군이 영국군 수송선단을 공격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수송선단에 튜링의 동료인 피터의 형이 탔다. 피터는 수송선단에 경고하자고 애원했지만, 튜링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암호체계가 깨진 사실을 독일이 안다면 영국이 더 이상 에니그마를 해독할 수 없게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정치권에서 흘러나온 첩보 출처
국정원장이 특수정보 상세 설명
북한 거짓말에 추가 노출 현실
국민과 정권, 누굴 지키려 하나

2016년 개봉한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에니그마의 해독은 전쟁이 끝난 뒤에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튜링의 일화는 정보 출처 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지난 22일 서해에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가 북한군 총격에 숨지는 과정에서 국방부와 군 당국의 최초 입장은 ‘이미테이션 게임’과 같았다. 북한군이 이씨를 사살한다는 첩보를 알고서도 대응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군 당국은 ▶북한 측 해역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피격 장소를 나중에서야 파악했으며 ▶북한이 이씨를 죽일 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여기에 군 관계자는 “정보·감시 자산을 북한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며 “전사(戰史)를 보면 이처럼 알고서도 모른 척하는 일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가 북한군에 사살된 북한 등산곶과 가까운 연평도 해상에서 해군 고속정이 움직이고 있다. [뉴시스]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가 북한군에 사살된 북한 등산곶과 가까운 연평도 해상에서 해군 고속정이 움직이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보 출처의 실마리를 군 당국이 먼저 공개한 셈이 됐다. 지난 24일 익명을 전제로 진행한 백그라운드 브리핑에서 군 당국은 “북한군이 이씨의 표류 경위를 확인하면서 월북 진술을 들었다” “상부로부터 사격명령이 내려졌다” 등 사건 당시 정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그러면서 익명의 군 관계자는 “평소 같으면 언론에 풀지 않을 내용인데, 관심이 큰 사안이기 때문에 방침을 바꿨다”고 귀띔했다. 선심을 썼다는 취지로 들렸지만, ‘국민이 죽어가는 걸 지켜봤다’는 비판을 잠재우려고 군 당국이 다급했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정보 출처는 결국 정치권을 통해서 밝혀졌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25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간담회에서 “SI상 본인(이씨)이 월북했다는 표현이 있다”고 언급한 게 그대로 새나갔다. 특수정보(Special Intelligence)의 약자인 SI는 감청으로 얻은 첩보를 뜻한다.
 
여당 의원들은 한술 더 떴다. 국방위원장인 민홍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9일 라디오 방송에서 ‘(군 당국이) 구체적인 대화 내용까지 (국회에) 보고했냐’는 질문을 받고는 “그것은 보고가 안 됐다. SI라고 아주 고급 첩보”라고 답했다. 황희 민주당 의원은 28일 “한·미 간 첩보와 정보에 의하면 유가족에게는 대단히 안타깝지만, 이씨의 월북은 사실로 확인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정보 제공을 인정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미국의소리(VOA)는 사건 당일인 22일 오후 미국의 통신감청 정찰기인 RC-135W 리벳조인트가 서해 상공에서 비행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준 정보를 동맹국이나 우방국이 유출하는 경우를 가장 꺼린다. 미국이 한국에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는 소리도 들린다.
 
안영호 합참 작전본부장이 24일 국회에서 이씨 피살 사건 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안영호 합참 작전본부장이 24일 국회에서 이씨 피살 사건 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군 당국에 더 큰 악몽은 북한이 25일 보낸 통지문 한장으로 비롯됐다. SI와 미국이라는 천기를 누설하면서까지 사건 경과를 설명했지만, 북한이 대부분 부인했다. 특히 시신 소각 여부에 대해선 전혀 딴소리였다. 반인륜적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려는 듯 이씨의 시신이 아니라 해상 부유물에다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이러면서 군 당국이 북한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더 자세한 첩보를 내놔야만 한다는 우려가 나왔는데, 곧 현실로 나타났다. 해경은 29일 “국방부 확인 결과 실종자 이씨만이 알 수 있는 이름·나이·고향·키 등 신상 정보를 북한이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국방부 핵심관계자는 28일 “(이씨 피살 관련) 우리(가 수집한)의 (대북) 정보를 다시 들여다볼 예정”이라며 “제3자의 입장에서 다시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군 당국의 정보를 입증하기 위해 재점검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북한의 거짓말에 사실을 다시 짜 맞추려는 포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청와대와 여권이 북한의 통지문에 담긴 ‘김정은의 사과’를 높이 평가하고, “남북이 열린 자세로 사실관계를 함께 밝혀내자”고 제안하면서 이런 해석이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국방부와 군 당국은 만신창이 신세가 됐다. 국민의 생명과 정보 출처 보호를 맞바꾸려 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명분을 잃었고, 정치권의 정보 출처 폭로로 실리까지 놓쳤다. 청와대의 장단 속에 국방부의 자기분열은 결정타였다.
 
예비역을 물론 현역 사이에서도 한탄이 나온다. 국방부와 군 당국이 소신을 갖지 않고, 정치권의 눈치만 보면서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벌어진 사달이라는 것이다. 익명의 현역 장교는 “정권마다 입맛에 맞는 장성이 살아남으면서 군은 점점 ‘사자’에서 ‘양’으로 변해갔다”고 자조했다.
 
군 안팎에선 무엇보다 이씨가 서해 북방한계선(NLL) 북쪽에서 죽어가는 동안 군 당국이 수색작전 이외 별다른 군사작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분개한다. 북측 해역의 상황이기 때문에 아예 작전을 짜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 예비역 장성은 “군이 이씨를 구조하는 군사작전을 들고 청와대를 설득이라도 해야 하는데, 애당초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사명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군인들을 만나보면 자신들의 노고를 사회가 몰라봐 준다며 섭섭해한다. 제복의 권위는 거저 얻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군이 깨닫길 바랄 뿐이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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