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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불편함’이 도덕의 근거가 될 때

중앙일보 2020.09.30 00:15 종합 28면 지면보기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불편하다’는 느낌이 한 사회의 도덕 수준을 높이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우리가 불편함을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느끼는 예민한 사람이 되면 사회가 더 나아질까? 타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도덕적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도덕적 직관은 늘 믿을 만한가
특정 개인 향한 인터넷 조리돌림
집단 지성인가, 군중 심리인가

2020년 한국 사회의 뉴노멀 중 하나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된다’다. 이 ‘사람들’의 자리에 ‘대중’을 넣느냐, ‘시민’을 넣느냐에 따라 이 명령에 대한 평가도 천지 차이로 달라질 테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중과 시민으로 명쾌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함을 대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대중이 되기도 하고 시민이 되기도 한다고 봐야 한다.
 
그 과정의 표면은 대체로 이렇다. ① 사회 현상이나 특정 인물의 언행에 대해 누군가 불편함을 느끼고 그 사실을 토로한다. ② 그 불편함에 동조하는 이들이 생긴다. 이들이 의견을 교환하면서 불편함의 원인을 탐구한다. ③ 동조자의 수가 많아지면 ‘논란’ 등의 제목을 달고 언론에서 기사화한다. ④ 논란거리를 피하고 싶은 공인들이 해당 언행을 주의하게 되고, 새로운 사회 문화가 만들어진다.
 
이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일어나던 현상이며, 사회 진보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터넷은 ①~④번의 시간을 엄청나게 줄였고, 그 바람에 우리는 숙고할 기회를 자꾸 놓치는 듯하다. 그런 만큼 시민 민주주의가 대중 독재로 전락할 우려도 커졌다.
 
단계별로 고민해봐야 할 사항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먼저 불편함이라는 감각에 대해 성찰해 봐야 한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도덕적 직관이 있다. 불공정한 일, 부조리한 일을 목격했을 때 그 원인을 정확한 언어로 정리하기 전에 ‘이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막연한 감각을 느낀다. 느낌이 앞서고 이성은 나중이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는 불편함이라는 신호가 꼭 불공정·부조리에 대해서만 켜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위생이나 질서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반응한다. 우리의 마음은 자존심이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자극에 대해서도 아주 날카로운 불편함을 느낀다. 어릴 때 배운 것과 다른 얘기를 들으면 불편해진다. 때로는 진실도 불편하다.
 
게다가 도덕적 직관이라는 경보기 자체도 결함이 많다. 그 도구는 인간이 유인원일 때부터 수백만 년에 걸쳐 뇌에 천천히 새겨진 회로다. 기본적으로 석기 시대 부족사회의 삶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 직관은 협상이나 관용보다는 복수와 응징으로 쉽게 기울어진다.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근대의 발명품은 그 회로에 없다.
 
그러므로 직관을 검증하는 이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단순히 동조자가 많다고 해서 이 단계를 통과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내가 느끼기에 불편하니까 저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은 유아적이다. ‘우리가 느끼기에 불편하니까 저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얼마나 집단적 오류에 빠지기 쉬운 동물인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그런 성찰을 하기에 현재의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지극히 부적절한 장소다. 짧은 단상은 순식간에 멀리 퍼지는 반면, 긴 텍스트는 온전한 모양으로 전파되기 어렵다. 인터넷에서 남의 깊은 논리에 설득되는 일은 거의 없는 반면, 극단적인 감정에 전염되는 현상은 흔하다. 트래픽이 커질수록 집단지성이 아닌 군중심리가 나타난다. 구조 자체가 그렇다.
 
사람들이 감정에 휩싸인 채 뭉치면 과격해진다. 사회 제도의 발전이 아니라 특정 개인의 처벌을 원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소셜 미디어 어느 한구석에서는 인민재판과 조리돌림이 한창이다. 그런 집단 폭력에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괴롭힘을 당하는 당사자의 아픔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걸까. 아이러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끔찍하다. 하기는, 십자군도, 나치 돌격대원도, 홍위병도 자신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으리라.
 
내 생각에 위에 적은 ①~④의 과정은 지금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급하고 거칠게 이뤄지기에 문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문제는 도덕적 감수성이나 공감 능력의 부족에 있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합리적 이성과 같은 적절한 브레이크가 모자라는 게 문제다. ‘무엇 무엇은 혐오’라는 식의 규정짓기가 사안을 새롭게 바라보는 통찰을 가져오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논의 자체를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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