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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닷새뒤 불쑥 찾아온 김두한 "내 밑에 청년들 써달라"

중앙일보 2020.09.30 00:02 종합 6면 지면보기

언택트 한가위 - 내일 국군의 날, 김웅수 장군 회고록으로 본 6·25

6·25 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창군 주역인 고(故) 김웅수 장군(1923~2018)의 회고록이 유가족(딸 김미영씨)에 의해 발견됐다. 2004~2005년에 작성된 회고록에는 고 백선엽 장군과 함께한 6·25 전쟁 시절 일화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군 요직에 발탁한 일, 이후 발생한 5·16 군사 쿠데타 등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 다수 담겼다. 10월 1일 제72주년 국군의날을 맞아 지금껏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일부를 공개한다.
 

당시 한·미 군 지휘부 비밀회의
북진 구상 미 상층부 반대로 철회

백선엽 장군 밑 제2사단장 지내
“철원 확보 위해 화살머리고지 사수”

김두한 “내 밑 청년들 국방에 써달라”
무작정 찾아와 요청, 애국심에 감탄

6·25 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왼쪽)이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웅수 제2사단장을 격려 방문했다. [사진 김웅수 장군 유가족]

6·25 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왼쪽)이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웅수 제2사단장을 격려 방문했다. [사진 김웅수 장군 유가족]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휴전선=회고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백선엽 장군과의 인연과 6·25 전쟁이었다. 이 중 특히 한·미가 전쟁 중 한반도 최단거리 방어선(철원~원산)을 구상했다가 무위로 돌아갔다는 대목은 김 장군의 회고록만큼 생생한 증언이 나온 경우가 흔치 않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부터 1953년 4월까지 백 장군 밑에서 2군단 참모장을 지낸 김 장군은 백 장군과 함께한 비밀회의를 기억했다. 김 장군은 “백 장군이 군단장으로 재직하던 1952년 어느 날 저녁 한·미 지휘부만 작전상황실에 모여 전선을 철원~원산 선으로 이동하는 공격명령을 작성했다”고 적었다. 이 전선이 미8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한반도 최단거리 방어선이었다는 게 김 장군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틀 뒤 해당 계획은 전격 취소됐다. 김 장군은 “사령관의 계획이 미 상층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 같았다”며 “그 계획이 실현됐다면 휴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 현재 어떤 모양이 됐을지 궁금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정희(오른쪽) 전 대통령과 김두한씨. 중앙포토

박정희(오른쪽) 전 대통령과 김두한씨. 중앙포토

◆화살머리고지 사수=김 장군은 6·25 전쟁 격전지인 화살머리고지 사수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휴전을 앞둔 1953년 6월과 7월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국군 180여 명, 중공군 1300여 명이 사망할 정도로 치열했다. 1953년 5월 제2사단장으로 부임한 김 장군은 당시 각오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철원평야를 수중에 넣기 위해선 백마산이 필요했고, 백마산을 위해선 여기에서 100m 떨어진 화살머리고지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적의 집요한 공격으로 두 차례 이 고지를 빼앗긴 적도 있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러도 철원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백마고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화살머리고지가 절실했다.”
 
2018년 남북은 9·19 군사분야 합의를 체결하고 화살머리고지에서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서기로 했다. 여기엔 남북한 병력뿐 아니라 프랑스군, 중공군 등 참전국 병력 희생이 상당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1946년 통위부(국방부 전신) 시절 김웅수 장군(왼쪽)이 창군 동기인 강영훈 장군과 대화하고 있다. 1988년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낸 강 장군은 김 장군의 매제다. [사진 김웅수 장군 유가족]

1946년 통위부(국방부 전신) 시절 김웅수 장군(왼쪽)이 창군 동기인 강영훈 장군과 대화하고 있다. 1988년부터 2년간 국무총리를 지낸 강 장군은 김 장군의 매제다. [사진 김웅수 장군 유가족]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강렬한 인상=김 장군은 회고록에서 6·25 전쟁 중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일 중 하나로 ‘애국청년 김두한씨의 방문’을 꼽았다. 1950년 6월 30일 김두한이라는 사람이 면담을 요구하며 무작정 찾아오더니 “자기 밑에 약간의 청년들이 있으니 이런 어려운 시국에 자기들이 무장해 일선 방어 임무에 가담하도록 해 달라”고 간곡한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김두한을 실제로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는 김 장군은 그에게 “군인들에게도 무기가 부족한 데다 훈련 없이 애국심만 가지고 싸울 수도 없다”며 “후방의 소란을 막는 데 전력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장군은 “나는 실로 그 용기와 애국심에 감탄했다”고 그날의 강렬한 기억을 떠올렸다.
 
◆박정희의 난데없는 혁명 제안=김 장군은 전쟁 후 방대해진 군의 정치화를 비판적으로 보고 또 고민했다. 이즈음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960년 육군 군수참모부장으로 재직하던 김 장군은 부산에 군수기지사령부를 창설하기로 하면서 자신의 차장 격인 사령관으로 당시 소장이던 박 전 대통령을 추천했다. 김 장군은 “청렴하고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한 번쯤 같이 근무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김 장군은 박 전 대통령의 사령관 취임을 위해 동래여관에 함께 묵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오후 내방한 박 장군은 나에게 느닷없이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이대로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군인들이 혁명을 한다고 나라가 잘된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반문했고, 그 이상 말은 진전되지 않았다.”
 
김 장군은 1961년 5·16 쿠데타 후 군에서 예편한 뒤 ‘반혁명’ 죄목으로 1년 가까이 복역했다. 그는 “5·16을 주도한 사람이나 반대한 자들은 각기 나름대로 국가관과 철학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며 “나는 지금 다시 그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술했다.
 
김웅수 장군
192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45년 귀국,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뒤 1946년 졸업 후 참위(당시 소위 계급)로 임관했다. 이때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6·25 전쟁 중 백선엽 장군의 지명으로 육군 제2사단장이 돼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에는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육군편제 개편위원장을 지냈다. 5·16 쿠데타 후 예편해 1972~93년 워싱턴DC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2018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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