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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에서 1년반…지옥훈련 뒤 北 보복위해 백령도 간 그들

중앙일보 2020.09.26 12:00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드디어 김일성 모가지를 따러 가는구나.”

 
1969년 10월. 실미도 백사장에 어둠이 깔리자 검은 그림자 10여 개가 움직인다. 숨소리조차 죽인 그림자들은 서둘러 공작선에 오른다. 공작선은 칠흑 같은 바다로 모습을 감췄다. 공작선은 백령도를 향해 내달렸고, ‘실미도 부대’ 공작원 10여명과 기간병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공작선에는 밤에 북한 상공으로 침투할 때 사용할 수소용 기구(氣球)와 개인화기, 폭약 등이 잔뜩 실려 있었다. 실미도 부대가 1년 반 동안의 지옥훈련을 끝내고 드디어 북한 침투 공작을 위해 출발하는 순간이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⑥]취소된 북한 침투작전

 
실미도부대는 백령도로 출발할 때 윗선으로부터 명확한 북한 침투 명령을 하달받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화기로 중무장하고 폭약과 기구까지 싣고 백령도로 향하는 목적은 단 하나, 공작원이나 기간병이나 모두 ‘북파 공작 개시’를 직감했다. 한밤중 찬 바람이 때리는 바다 위에서 20대 청년들은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공작에 실패할 경우 북한 땅 어디선가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 그러면 나의 조국은 내 시신이나마 수습해 줄까. 나의 가족은 내 생사라도 전해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실미도 공작원들은 ‘김일성 모가지를 따 금의환향할 수 있다’고 되뇌었다. 실미도 지옥훈련을 견뎌냈고, 자신들이 북한의 ‘김신조 부대’를 능가한다고 믿었다.
 

백령도 선발대 사흘 만에 회군 명령받아  

백령도에 도착한 선발대는 북한 침투 전초 기지를 세웠다. 10여㎞ 떨어진 북한 땅에서 보이지 않게 섬 남쪽에 막사를 꾸리고 기구를 띄울 장소를 물색했다. 백령도에서 실미도 부대의 최종 목적지인 평양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150㎞, 바람이 북쪽으로 향하는 날 기구로 몇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이들은 1년 반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동고동락한 후발대가 어서 도착해 평양으로의 침투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고대했다. 실미도에 남은 나머지 공작원 20명가량 역시 북쪽 바다만 바라보며 백령도 합류 명령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선발대가 백령도에 도착한 지 사흘째. 공작원들은 기간병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다. 기간병들의 초조함이 읽혔고, 허공을 향한 욕설도 잦아졌다. 급기야 실미도부대는 북파 공작 일체를 멈추라는 지시를 받는다. 또 선발대는 ‘실미도로 즉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북파공작이 돌연 취소된 것이다. 기간병들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실미도 선발대는 이유도 모른 채 북한 땅을 뒤로하고 사흘 만에 회군했다. 실미도에 도착한 선발대를 맞은 건 풀이 죽은 동료들이었다. 서슬 퍼렇던 기간병들의 기세도 분명 달라졌다. 실미도 공작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변화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8월 25일 실미도 해변가. 멀리 무의도가 보인다. 우상조 기자

8월 25일 실미도 해변가. 멀리 무의도가 보인다. 우상조 기자

실미도부대 책임자 김형욱 중정부장 전격 교체    

인천에서 실미도 공작원들이 이유도 모른 채 백령도에서 회군할 당시 서울에서는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에서 김계원으로 전격 교체됐다. 실미도 부대의 대북 침투 작전이 취소된 건 이들의 교체와 직접 결부돼 있었다. 무인도에 감금당한 채 혹독한 훈련과 반공 교육으로 세뇌된 31명의 청년이 ‘김일성 모가지를 따겠다’고 북침 공작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중앙정보부의 수장이 교체되면서 실미도 부대 작전 역시 급작스럽게 취소된 것이다.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김형욱 전 중정부장 회고록 『혁명과 우상3』 中
1969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여름 날씨로 접어들자 이만하면 결사대가 야영해도 얼어 죽진 않겠다고 판단하고, 박정희에게 “평양에 결사대를 투입할 준비가 됐다”고 보고했다. 처음에는 그다지도 열렬한 관심을 보이던 박정희가 웬일인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박정희는 그때 이미 평양 당국과 비밀교섭을 모색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한 지 이틀 뒤에 훈련을 담당한 조천성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코가 쑤욱 빠져 돌아왔다.
 
“각하가 다른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보류하고 계획을 연기하라는 지시입니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 봐, 김 부장. 만약 그들이 우리의 기습작전에 보복해오는 경우 우리에게는 계속 투입할 병력이 없지 않나 말이야.”
 
“보충할 병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번에 그자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국민들의 사기에도 영향이 많습니다. 우리는 북한놈들에게 당하고만 사는 존재라는 식의 패배의식이 팽배하는 것은 국민총화에도 지장이 많다는 것을 각하께서 깊이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그 뜻은 알겠어. 그러나 보류하자고. 내 말 알겠소?”
 
“알겠습니다.”
 
나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음성으로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네댓 달 뒤 나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나 실미도에서 훈련 중인 결사대에 대해서도 한동안 잊고 있었다.
1968년 7월 20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중앙포토

1968년 7월 20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중앙포토

 
실미도 부대의 대북 침투 작전을 놓고 중앙정보부 내부 문서에서 우왕좌왕했던 정황이 포착된다. 어이없게도 주요 공작 목표조차 자주 바뀌었다. 김신조 부대 피습 직후 실미도 부대를 창설할 때만 해도 주요 공격 타깃은 분명히 김일성 북한 주석이었다. 하지만 1969년을 즈음해 공격 목표는 순안 비행장, 부전강 발전소, 풍천 미사일 기지, 공수산 미사일 기지, 선덕 비행장 순으로 5차례 바뀌었다.
 

안보지형 변화하자 골칫거리로 전락  

중앙정보부장의 교체도 실미도 부대의 공격 목표가 바뀐 것도 이유는 단 하나, 1969년 중소 국경분쟁을 계기로 한반도 안보지형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말 미국은 아시아 각국에 대한 군사 불개입과 아시아 각국 스스로의 방위를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한다. 서울 북부를 지키던 미 7사단과 2사단의 철수 카드도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북한과 국제공산주의에 맞서 스스로 안보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면서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 역시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안보 지형이 변화하자 실미도 부대는 순식간에 존재 이유를 잃었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골칫거리로 방치되기에 이른다. 부대 입소 시 약속받았던 훈련 기간 6개월은 기약 없이 늘어졌고, 급식도 개밥이나 돼지밥 수준으로 열악해졌다. 그렇다고 실미도에 가둬 둔 부대를 해체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훈련이 지옥이었다면, 이제는 기간병과 공작원이 뒤섞인 부대 자체가 지옥으로 변해갔다. 다음 회에서 계속.
 
※2006년 발표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김민중·심석용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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