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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파고들면 삶의 해법이 보인다

중앙선데이 2020.09.26 00:20 705호 20면 지면보기
인간의 내밀한 역사

인간의 내밀한 역사

인간의 내밀한 역사
시어도어 젤딘 지음

옥스퍼드 교수 ‘희망의 인류사’
18개국 현대인들과 오랜 대화

인생 실패 체념은 노예제 유산
지각 초점 바꾸면 행동 달라져

김태우 옮김
어크로스
 
태풍은 커다란 피해를 주는 자연재해지만 이로운 점도 없진 않다. 허술했던 지붕이나 난간 등을 손보게 해 자칫 더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인재(人災)를 예방해준다는 것이다. 전 세계 인류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도, 그런 의미에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오래전에 나왔다가 절판돼 구할 수 없었던 좋은 책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 사태로 사정이 어려운 (아니 더 어려워진) 출판계가, 비용 절감 차원에서 옛 책들에 관심을 보이는 덕분이다.
 
이 책도 그런 책이다. 1999년 초판, 2005년 개정판이 나온 뒤 안타깝게도 절판됐다가 출판사를 바꿔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어쩌면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인지도 모르겠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저자와의 여행을 통해, 코로나로 인한 현실적 고통의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것은 이 책이 일반적인 역사책과는 좀 다른 까닭이다. 궁극적으로 역사학 서적으로 분류될지라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읽는 역사책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E. H. 카가 정의했지만, 이 책처럼 과거와 현재가 책 속에서 직접 대화하고 있는 역사서적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젤딘이 기술하는 역사는 박물관 진열장 안에 잠들어 있는 유물에 대한 설명이나 연대기 중심의 전쟁사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는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런 과거”에 대해 쓴다. 자유가 크게 신장됐음에도 어째서 인간은 구속된 삶을 영위해야 하는 건지, 의학과 과학의 놀랄만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포와 좌절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개방과 풍요의 시대에도 인간은 왜 여전히 우울한 건지 같은 현대인의 내면을 옭아매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금 우리 머릿속의 생각은 과거 집단 경험의 결과인지 모른다. 지난 여름 서울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의 출근길 풍경. [연합뉴스]

지금 우리 머릿속의 생각은 과거 집단 경험의 결과인지 모른다. 지난 여름 서울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의 출근길 풍경. [연합뉴스]

저자는 현재에서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과거와 현재 사이의 새로운 접점을 찾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18개국의 현대인들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다양한 종류의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인류의 과거 경험에 비춰 탈출구를 제시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사람이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 인류의 경험을 이용할 수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저자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 외치는 여성 쥘리에트를 만난다. 51세의 그녀는 가정부 일을 하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도 가정부였고 그녀의 자식들 또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실패한 인생”이라는 체념을 저자는 “노예제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해석한다. 그가 살피는 노예제의 역사는 현대에까지 이른다. “오늘날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을 지기보다 남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는 사람은 스스로 노예가 된 러시아 노예들의 정신적 후예”라는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영국인들의 3분의 1이 그렇게 (노예처럼) 산다.
 
야심에 찬 고위 관료나 기업의 고위 간부들 역시 노예의 후손이다. 과거 오스만 제국이나 중국에서는 노예나 환관이 국정을 담당했다. 이들에게 거세는 가족보다 국가에 충성한다는 증명이었다. 오늘날 고용주(또는 국가)에 의해 도덕적으로 거세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자가 보기에 쥘리에트는 그렇게 스스로 노예의 삶으로 걸어 들어간 경우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은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린 것이다. “지각의 초점을 바꾸기만 해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행동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저자는 보여준다.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를 통해 다양한 맥락 속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자신의 문제가 필연적 또는 극복 불가능한 게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책은 이처럼 과거와의 대화가 현재의 삶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희망의 인류사’다. 이 책이 27개 언어로 번역돼 출간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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