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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피하고 칼로리 박사인 아이 ‘프로아나’ 위험 신호

중앙선데이 2020.09.26 00:20 705호 26면 지면보기

[아이 마음 다이어리] 신경성 식욕부진증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가 2007년 거식증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찍은 캠페인 광고 포스터. 이사벨 카로는 2010년 거식증으로 사망했다. [AP=연합뉴스]

프랑스 모델 이사벨 카로가 2007년 거식증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찍은 캠페인 광고 포스터. 이사벨 카로는 2010년 거식증으로 사망했다. [AP=연합뉴스]

“이거 씹어 삼킨다고 세상이 폭발하진 않아”
 

사망률 15% 위험한 정신 질환
몸매에 대한 오해·집착서 비롯

“외모 탓에 소외” 식욕 잃고 우울증
식행동일지 쓰고 인지치료로 호전

최근 SNS 거식증 부추기기 유행
시기 놓쳐 치명적 결과 부를수도

이는 영화 ‘투 더 본(To the bone)’에 나온 대사 중 하나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치료를 위해 의사가 운영하는 ‘그룹홈’에서 만난 루크라는 환자가 주인공 엘런에게 초코 쿠키를 권하며 한 말이다. 이 영화는 2017년도 선댄스 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된 후 넷플릭스에서 방영돼 세계인에게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이라는 정신장애의 심각성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일반인에게 흔히 거식증으로 알려져 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에게는 작은 과자 한 조각 먹는 것조차 큰 용기이자 도전이다.
  
# 153cm에 30kg 몸인데 “먹기 싫어요”
 
여중생 인혜(가명)는 입원할 당시 키 153cm에 몸무게 30kg으로 체질량지수 13인 상태였다. 14세 여자 청소년의 체질량지수 정상범위는 16~23이다. 내가 인혜를 처음 봤을 때 얼굴은 매우 창백했고 곧 쓰러질 것 같은 비쩍 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의료진에게 상당히 예의 바르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먹기 싫은데 여기에서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할까 봐 겁이 나요”라며 두려움을 표현했다.
 
인혜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에서 3년간 살다 6개월 전 귀국했다.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 캐나다에서 작은 얼굴의 백인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볼 때마다 자신만 얼굴이 넓적하고 다리가 뚱뚱하다고 생각했다. 학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기가 싫어 손만 재빨리 씻고 후다닥 뛰쳐나왔고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6학년이 되면서 유일한 캐나다 친구였던 레이첼이 자신을 피하고 다른 친구들하고만 어울리는 일이 생겼다. 인혜는 ‘내 외모가 못나고 뚱뚱해서 친구들이 나랑 같이 다니기 부끄러운가 보다’라고 생각했고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후 인혜는 우울하고 식욕이 없어져 식사도 안 하고 평소 좋아하던 간식도 먹지 않게 되었다.
 
일러스트=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일러스트=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인혜는 공부마저 못하면 친구들에게 더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해 매일 예·복습을 하며 좋은 성적을 받으려 노력했다. 인혜는 모든 일에 꼼꼼하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이었다. 엄마가 식사를 차려주면 밥공기의 4분의 1만 덜어서 먹었고 나물 5가닥을 정확히 세어 먹었다. 반찬 하나하나의 칼로리를 정확히 계산했고 자신이 정한 하루 칼로리를 초과할 경우 무조건 음식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식사를 굶는 경우가 많아지고 체중이 28kg까지 줄면서 엄마와 음식을 앞에 두고 “이건 먹자” “절대 안 먹는다”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부모는 인혜가 캐나다보다는 한국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을 거라 기대했다. 서울의 한 중학교로 전학 온 후 초반에는 잘 지내는 듯했으나 식사 거부와 체중·체형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점점 심각해졌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란 신체적 건강을 위한 정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저체중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체중 증가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장애다. 자신의 체중이나 체형을 왜곡해서 생각한다. 인혜가 객관적 사실과 다르게 자신의 외모가 못나고 뚱뚱하다고 왜곡해 지각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어린 환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빠져있는지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부정한다. 영화 ‘투 더 본’에서 엘런이 “저는 제 건강이 심각하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날씬한 게 건강하다고들 하잖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병을 지닌 환자들의 전형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역사적으로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초기 의학적 설명은 1689년 영국인 의사 리처드 모튼(Richard Morton)에 의해 기술되었다. 이후로도 관련된 사례들이 계속 발표되다가 1873년 빅토리아 여왕의 주치의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굴(William Gull) 경이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상세한 사례 설명과 치료법을 제안했다. 영문 용어인 ‘anorexia nervosa’의 anorexia는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사 ‘an’과 식욕을 의미하는 ‘orexis’의 합성어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진단 기준
① 에너지 섭취 제한으로 인해 나이, 성별, 발달과정, 신체적 건강을 고려한 체중이 유의미하게 낮다. 유의미하게 낮은 체중은 최소한의 정상 체중보다 낮은 체중을 의미한다.  
 
② 체중이 유의미하게 낮은데도 체중이 늘거나 뚱뚱하게 되는 것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보이고, 체중 증가를 피하기 위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한다.
 
③ 체중과 체형에 대한 경험이 왜곡돼 자신에 대한 평가에 체중이나 체형의 영향이 지나치다. 또는 현재의 낮은 체중의 심각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10대 청소년에서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는 1000명당 3~7명 정도 발생하며 여자 청소년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지난해 9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진료 현황을 분석한 결과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섭식장애가 약 1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대 청소년 중에서는 13~14세와 17~18세에서 가장 많이 발병했다. 최근에는 10세 미만의 어린 환자들도 늘고 있다. 아이들의 경우 병의 심각한 정도를 평가할 때 체질량지수 자체보다는 나이와 성별에 따른 체질량지수 백분위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 국가·사회가 ‘프로아나’ 대책 세워야
 
부모는 자녀에게 나타나는 신경성 식욕부진증의 신호를 초기에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엄마가 밥 먹자고 할 때 아이가 식사를 먼저 했다거나 나중에 먹겠다는 식으로 함께 식사하기를 피하는 경우가 있다. 남들 앞에서 먹지 않고 혼자 비밀스럽게 먹어야 음식의 종류와 양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식사할 때 음식 하나하나의 칼로리를 정확히 외우고 섭취한 칼로리를 계산하는 것도 징후다. 식사 후 아이가 지나치게 많이 움직이려 한다거나 운동을 못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과도하게 불안해하는 것도 중요한 신호다. 폭식과 제거를 동반한 거식증 환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방에서 몰래 먹은 과자 봉지나 음식 포장지가 발견되기도 하고, 먹은 음식을 화장실에서 토한 냄새나 흔적이 있다. 변비약이나 이뇨제 봉투가 발견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입원했던 여고생 환자는 병원에서 세 끼 식사를 남김없이 다 비웠지만 몇 주 후 뱉은 음식들을 휴지로 싸서 모아놓은 것이 아이 사물함 속에서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지나칠 정도로 마른 몸을 선망하는 ‘프로아나(pro-ana)’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프로아나는 거식증(anorexia)의 식습관을 지지(pro)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현상은 인터넷 문화가 처음 발달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해외에서 처음 유행했다. 이후 블로그와 SNS가 활발해지면서 최근 들어 2차 유행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전문가는 ‘프로아나족’의 행위를 신경성 식욕부진증 환자들이 하는 비정상적 섭식 행위와 동일한 정신장애로 간주한다.
 
그러나 ‘프로아나족’은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항변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근 여기에 10대 청소년까지 가세했고 심지어 초등학교 저학년 아동들에게도 ‘프로아나’ 유행이 놀이처럼 퍼지고 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사망률이 15%에 육박하는 위험한 질병으로, 초기에 개입해서 신속한 치료가 이뤄져야 한다. ‘프로아나’의 유행은 치료 시기를 늦춰 병세를 악화할 수 있다.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인혜는 심각한 우울증이 동반된 상태였다. 입원 동안 인지행동 치료와 가족 치료를 받았다. 식행동 일지도 빠짐없이 작성했다. 체중이 조금씩 늘어났고 영양 상태와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신경성 식욕부진증을 지닌 청소년은 가족적 요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개입이 필수적이다. 입원치료와 몇 년간의 외래 치료를 통해 부모는 더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인혜와 싸우지 않게 되었다. 치료 과정에서 아이의 감정에 집중하여 대화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인혜를 못 본 지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 대학생이 되었을 인혜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혜야, 너무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마. 넌 이미 많은 걸 성취했고 너무 잘하고 있어!”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 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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