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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재발 방지 약속에도 12년만에 또 남한 민간인 사살한 北

중앙일보 2020.09.24 13:57
지난 2009년 8월 16일 김정은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은 북한 묘향산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났다. 현 회장은 귀환 직후 "김 위원장이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김 위원장의 말을 전했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지역 군부대에서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소위 박왕자씨 사건에 대한 재발 방지 약속이었다.
 

"북, 22일 어업지도선 공무원 해상서 사살"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땐 우발 상황
이번에 해상 발견 후 상부 지시 받아 사살

2008년 7월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의 피격사건 정부합동조사단 황부기 단장(당시)이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8년 7월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의 피격사건 정부합동조사단 황부기 단장(당시)이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하지만 북한군의 총격에 의한 민간인 피격 사건이 김정일 위원장의 약속 12년 만에 다시 일어났다. 정부 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지도선에서 근무 중이던 A씨는 21일 신발을 벗어두고, 구명복을 착용한 채 어업지도선을 이탈했다. 그러곤 다음날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북 등산곶 인근에서 북한군에 발견됐다. 북한군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후 이모씨(47)에게 총격을 가하고 해상에서 기름을 붓고 태웠다.

 
이번 사건은 장소와 방식은 달랐지만, 북한군이 총격을 가해 우리 국민을 사망케 했다는 점에서 박왕자씨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남북 관계 냉각기에, 북한군의 기강 확립이 강조되는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일치한다.
 
각각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와 지난 6월 북한이 한국을 적으로 규정한 뒤 발생했다. 사건 직전 북한군의 근무 태만으로 경계선이 뚫린 직후 간부가 교체된 점도 닮은꼴이다.
 
국방부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어업지도 업무를 하다 실종된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이 북한 측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고 24일 밝혔다. 사진은 공무원 A씨(47)가 탑승한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 [뉴스1]

국방부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어업지도 업무를 하다 실종된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이 북한 측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고 24일 밝혔다. 사진은 공무원 A씨(47)가 탑승한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 [뉴스1]

특히 지난 7월 19일 강화도를 떠난 탈북자가 개성에서 체포될 때까지 아무런 제지 없이 뚫리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상 확대회의를 열어 문책을 지시했다. 이후 북한군 전방에선 경계수위를 한층 높였다는 게 군 당국의 판단이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 모두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시점에 사건이 발생해 대형 악재로 작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차이점도 있다. 박왕자 씨의 경우 산책 중 실수로 북한 군부대에 들어갔다가 경계병의 정지 명령을 받은 뒤 해당 지역을 뛰어 이탈하는 과정에서 조준 사격을 받았다. 우발적인 상황이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이모씨는 물속에서 북한 단속정에 발견돼 도주의 우려가 없었다. 북한군이 이모씨를 육지에 들이지 않고 해상에서 신문한 후, 구명복을 입은 그를 상부의 지시에 따라 사격을 가한 점은 의도적인 '총격'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익명을 원한 당국자는 "북한이 한국을 '적'으로 규정하는 등 남북관계가 극도로 험악해지고, 지난 7월 월북한 탈북자에게 경계가 뚫렸던 상황이 이번 총격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며 "특히 코로나 19로 국경을 봉쇄한 북한이지만 해상에서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신까지 훼손한 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만행"이라고 말했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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