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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히딩크가 그리워

중앙일보 2020.09.24 00:38 종합 29면 지면보기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축구공은 둥글다. 왼쪽에 치우치거나 오른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땀 흘린 자에게 과실을 안겨준다. 그런 점에서 축구공은 ‘공정’과 ‘정의’의 아이콘으로 삼을 만하다. 엊그제 축구 스타 손흥민이 유럽 프로축구 무대에서 한 경기 4골을 터뜨렸다. 손흥민의 ‘포트트릭(FOUR 해트트릭)’ 소식에 대한민국의 모든 축구팬이 열광했다. 축구 경기에 좌우가 어디 있으며,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까. 어쨌든 왼발로 2골, 오른발로 2골을 터뜨린 손흥민의 물오른 기량은 전 세계 축구 팬의 찬사를 받을 만했다.
 

정치인 언행 여전히 수준 미달
분열과 갈등 치유할 리더십 필요
코로나로 고통받는 민심 달래야

손흥민의 기분 좋은 소식을 접하면서 축구공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축구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건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그라운드에서 펄펄 날았다. 덩달아 국민의 가슴에도 피가 펄펄 끓었다. 어디선가 “대~한민국!”이란 외침이 들리면 모든 이가 목이 터져라 따라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됐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어린아이도 똑같이 한마음이었다. 시청 앞 광장엔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흔드는 태극기의 물결이 장관을 이뤘다. 그해 여름, 광장엔 기쁨과 희열이 가득했다.
 
축구 열기에 불을 붙인 건 히딩크 감독이었다. 그는 고독한 승부사였다. 스타플레이어를 쥐락펴락하는 심리전의 달인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촌철살인을 날리는 언어의 마술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히딩크는 타성에 젖은 스타를 배제했다. 무명이라도 체력이 뛰어나거나 잠재력이 있는 선수를 과감히 발탁했다. 당시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이동국을 대표팀에서 떨어뜨린 건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긴 머리를 휘날리던 스타플레이어 안정환에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빼들었다. 고급 차를 몰고 다니던 안정환을 노골적으로 외면했다. 축구선수가 아니라 연예인에 가깝다는 독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무명에 가깝던 박지성을 발굴해낸 것도 히딩크였다. 체력이 뛰어난 그를 조련한 끝에 스타 플레이어로 키워냈다.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외모지만, 그라운드에 우뚝 선 그의 호령은 가을날 서리 같았다.
 
서소문 포럼 9/24

서소문 포럼 9/24

“골을 넣지 못하는 선수는 책망하지 않지만, 공이 빗나갈까 두려워 슈팅조차 시도하지 않는 선수에겐 책임을 묻겠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평가전에서 시원찮은 성적을 거두자 축구 팬과 언론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본선이 열리는 6월에 제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했다. 선수들에겐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신력을 일깨웠다.
 
“정신력이란 이를 악물고 쓰러질 때까지 뛰는 과도한 투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정신력이란 자신이 가진 기량과 체력을 90분 동안 효과적으로 분산해 소모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해 여름은 꿈만 같았다. 히딩크의 어퍼컷 세레모니에 국민들은 열광적인 환호로 화답했다. 우리는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청 앞으로, 강남역으로 뛰쳐나갔다. 수만 명이 한데 모여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응원을 펼치는 기분은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벅찬 희열이었다. 그야말로 축구공이 가져다준 국민 통합이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했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선수들은 물론 전 국민이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 히딩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내뱉는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추억은 아직도 짜릿하다. 그런데 2020년에 난데없이 히딩크 감독을 다시 불러낸 건 지금의 현실이 너무 퍅퍅하기 때문이다. 기쁨과 희열로 가득 찼던 광장엔 좌절과 분노가 넘쳐난다. 한데 뭉쳤던 국민은 이제 갈기갈기 찢어져 싸우기 바쁘다. 코로나19 사태마저 길어지면서 국민의 인내심은 한계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도 이 나라 정치인들의 언행은 수준 미달이다.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는커녕 저급한 언어로 연일 화를 돋운다. 히딩크의 리더십과 유머, 그의 촌철살인이 더욱 그리울 수밖에 없다. 정치와 축구는 엄연히 다른 분야지만 만약 히딩크라면 요즘 같은 상황에서 뭐라고 말했을까. 2002년 히딩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축구 팬들을 설득했다.
 
“다른 사람들이 ‘난제’라고 부를지라도 나는 ‘도전’이라 칭하겠다.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한가위가 코앞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질까 두려워 이번 추석에는 고향을 찾기도 어려워졌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이는 없는 걸까. 어떤 정치인은 카카오를 불러들이라고 했다는데 차라리 히딩크를 불러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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