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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盧의 친구 vs 문파 수장’ 문재인의 두 얼굴

중앙일보 2020.09.23 00:04
대통령 노무현은 “진보라도 타협할 건 타협” 열린 자세 보여
현 정부는 반대파 징계에 ‘통계 마사지’까지… 朴 그림자 어른

[커버 스토리 | 윤석만 논설위원의 ‘온 리버티(on liberty)’]
인권변호사의 원칙 대통령에겐 독(毒)이었나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문재인의 운명])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인터뷰에서 “사법시험 합격과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하 문재인, 노무현으로 표기) 2012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선 “내 별명 중 노무현의 그림자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기도 했죠. 노무현은 역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그를 추켜세웠습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데에는 노무현의 영향이 컸습니다. 2009년 5월 노무현의 죽음 당시 상주였던 문재인은 이듬해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며 ‘제2의 노무현’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의 위세가 컸던 만큼 진보 진영은 계속 문재인에 러브콜을 보냈고요. 지리멸렬함에 빠져 있던 야권은 노무현의 후광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가 문재인이었습니다.
 

“당신이 남긴 숙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과 문재인 대통령의 인권변호사 시절 모습. 두 사람은 1982년 부산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과 문재인 대통령의 인권변호사 시절 모습. 두 사람은 1982년 부산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영입 제안을 수차례 고사했던 문재인은 2011년 6월 ‘자의반타의 반’으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문재인의 운명]에서 그는 정치 입문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죠. “당신(노무현)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 하게 됐다”고 말입니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문재인은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됩니다. 두 달 후엔 “보통 사람이 중심이 된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요.
 
그때 노사모를 비롯해 노무현을 그리워했던 많은 지지자가 문재인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3년 전 노무현의 죽음을 집권세력과 보수 기득권층 탓이라고 생각했던 일부 강경파의 입김이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고요. 그러면서 노무현에 대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감정이 문재인에게 이입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문재인의 극성 지지자들인 ‘문파(문빠)’의 모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정치로 이끌고, 그의 강력한 지지기반이기도 했던 노무현은 그의 그림자라고 불렸던 문재인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또 원조 팬덤 세력인 노사모와 지금의 문파 역시 공통점보단 차이점이 더 많았고요. 일부 강성 지지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시민은 문재인이 제2의 노무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과 이들을 지지하는 집단의 정체성은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피난민의 아들

2017년 6월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열린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가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2017년 6월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열린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가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운명의 사슬로 얽힌 두 사람은 무엇이 같고 어떤 게 다를까요. ‘온 리버티’에서는 두 사람의 삶의 궤적과 언행, 정책 등을 통해 이들의 정치 철학과 스타일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보이는 문재인의 달빛은 노무현이 쏜 빛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노무현=문재인’일 수 없으며 ‘노사모=문파’도 아닙니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주인공(황정민)이 막내 여동생 막순이의 손을 놓쳐 생이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피난길에 오른 주인공의 가족은 미군의 배에 올라타려다 그만 이산가족이 돼버린 것이었죠. 바로 1950년 12월 23일 흥남 철수 때의 일입니다. 이 배에 탑승했던 피난민 중에는 문재인의 부모님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문재인은 “제 아버지는 공산주의가 싫어서 피란 오신 분이다. 영하 27도 흥남 부두에서 출발한 미국 화물선에 부모님과 누님이 타고 있었다”고 했죠(2017년 4월 24일 방송 연설).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온 부모님 사이에서 1953년 1월 문재인이 태어났습니다(경남 거제). 이후 부산으로 이주한 문재인의 가족은 곤궁한 삶을 이어 나갔습니다.
 
가난했지만 영특했던 소년 문재인은 부산의 명문 경남고(25회)에 수석 입학했습니다. 승효상(건축가), 박맹우·박종웅(정치인) 등 고교 동기 중에서도 문재인은 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후 4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72학번)에 수석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대신 학생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75년 4월 인혁당 관계자들이 사형된 후엔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됐고요. 두 달 후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는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강제 징집됐습니다.
 
전역 후 사시 공부를 시작해 1979년 1차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 시위 때 복학생 대표로 참여해 집회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 도중에 2차 시험을 치렀고, 합격증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사법연수원(22기)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자신이 꿈꿨던 판사로 임용되진 못했습니다. 시위 경력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죠. 결국 연수원 졸업 후 문재인은 고향으로 금의환향해 변호사 개업을 합니다. 그때 만난 운명이 노무현입니다.
 
1982년 노무현과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한 그는 인권변호사로 경력을 쌓기 시작합니다. 당시 부산 지역에선 안기부의 주요 시찰대상인 변호사가 4명 있었는데 그중 2명이 노무현과 문재인이었습니다. 다만 영화 ‘변호인’의 실제 모델인 ‘부림사건(1981년)’ 때도 문재인이 참여한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때는 노무현과 만나기 전이었죠.
 
합동법률사무소를 함께 시작한 후 노무현과 문재인은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노무현이 분신자살한 대우조선 노동자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는 문재인이 변호인단을 꾸려 변호를 맡기도 했죠. 당시 두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근로자를 돕고자 한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쓰인 명함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권 영입 제안을 받습니다. 몇 차례 거절 끝에 노무현은 정계에 입문해 ‘5공 청문회’ 스타가 됐고, 끝까지 거절한 문재인은 인권변호사로 남았습니다. 1990년 현대중공업 파업 때 82m의 크레인 꼭대기까지 올라간 일화는 유명합니다. 당시 문재인은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노동자가 있으니 가봐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고 하죠.
 
이처럼 문재인은 젊은 시절부터 주관이 뚜렷하고 소신을 지키는 강단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노무현 역시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죠. 실제로 2016년 1월 문재인은 당 대표 사퇴 의사를 밝힌 기자회견에서도 “온갖 흔들기 속에서도 혁신의 원칙을 지켰고, 혁신을 이뤘다”고 말할 만큼 원리·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원칙의 다른 이름은 불통

지난해 9월 미국 통신사 블룸버그가 낸 기사.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top spokesman)이 됐다’는 제목이다.

지난해 9월 미국 통신사 블룸버그가 낸 기사.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top spokesman)이 됐다’는 제목이다.

정치인이 원칙과 철학을 지키며 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온갖 이해관계와 회유, 압박을 이겨내는 것이 현실 정치에선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치가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원칙은 때론 독선과 독단이 되기도 합니다.
 
원칙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치인이 박근혜 전 대통령입니다. (이하 박근혜로 표기) 이명박 정부에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박근혜의 원칙은 같은 당 소속의 현역 대통령도 꺾기 어려웠죠. 당시 청와대는 행정수도 건설 대신 기업을 유치해 자족 도시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정부청사 이전으로는 기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죠.
 
그러나 박근혜는 이미 행정수도 이전에 찬성했었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앞서 2005년 고(故) 박세일 정책위의장(서울대 교수)이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하며 당 대표였던 박근혜와 갈등을 빚고 의원직을 사퇴한 것은 유명한 일화죠. 결국 행정수도 이전은 원래대로 추진됐습니다.
 
이외에도 박근혜는 한번 세운 원칙은 절대 바꾸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최고권력이 되기 전까지는 이런 점이 오히려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이 되고 난 후였죠. 원칙은 불통으로 변했고 박근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국정농단 사건으로 탄핵을 받았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 영웅인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수치는 정작 자국에서 발생한 로힝야족 학살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를 비롯한 국내외 정치의 많은 이슈에서 독단적 결정을 내리곤 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입니다.
 
이에 대해 미국 오바마 정부에서 미얀마 특사를 지낸 벤로즈는 미국의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기고문에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수치가 원하는 것은 국부의 딸로서 정당한 권리를 얻는 것이다. 수지의 주변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의사결정 스타일은 중앙집권적이고 여왕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정치인의 원칙과 소신은 그가 가진 권력이 커질수록 독선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이 가진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 유연성도 높아져야 합니다. 특히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한국에선 그를 통제할 만한 권력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열린 자세를 갖지 않는 한 독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문재인의 원칙도 그가 야당 대표이거나 인권변호사일 때는 큰 장점이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엔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문재인은 자신을 지지했던 국민뿐 아니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까지 모두 포용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원치 않는 대선 후보 시절의 약속까지 모두 지키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갈등과 혼란을 야기합니다.
 
원전 폐기 공약이 대표적이죠. 대통령의 약속이기 때문에 무조건 지켜야 한다며 밀어붙이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과학자와 일반 국민의 상당수도 원전 폐기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원전 가동률을 낮추면서 해외 연료 수입이 크게 늘고, 덩달아 전기료 인상 압박까지 커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원전을 대체할만한 새로운 에너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기후변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화석 에너지 사용을 감축하기도 힘들게 됐죠.
 
노무현 또한 문재인 못지않은 원칙주의자입니다. 그를 ‘5공 청문회’ 스타로 만든 것도, 3당 합당에 반대해 꼬마 민주당에 잔류한 것도 모두 시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원칙 때문이었죠. 이런 소신에 따라 그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서울 종로의 지역구를 떠나 부산으로 내려갔고, 연이어 고배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노무현은 자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2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바로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타결입니다. 이로 인해 노무현은 자신을 적극 지지했던 이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욕을 들어야 했죠.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초 한국갤럽 조사에서 응답자의 61%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투표한 것을 후회한다”고 답했습니다. 심지어 ‘2007년 대선에선 노무현이 미는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답변이 74%에 달했습니다.
 

원칙주의자 노무현의 유연성

2004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한 장병을 꼭 껴안은 채 활짝 웃고 있다.

2004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아르빌에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한 장병을 꼭 껴안은 채 활짝 웃고 있다.

이 같은 지지층 이탈의 심경을 잘 보여주는 것이 2009년 진보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의 한 언론 인터뷰입니다.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한국이 무한히 자랑스러웠다. 노무현의 한국은 희망의 오아시스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 뒤로는 가슴 아픈 일이 하도 많아 그때의 감동은 여지없이 사라졌다.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의 죽음 이후에는 ‘노무현’이란 더 이상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실제 생전의 노무현도 “확실히 저한테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이라크 파병 때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한·미 FTA를 추진한 것에 대해서는 “지지자를 배신하면서 국가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습니다. 노무현은 자신의 책 [진보의 미래]에서 “김대중·노무현이 진보주의를 배신했다면 배신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노무현의 말처럼 당시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추진은 대외적으로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위한 결단을 하는 대신 정치가 노무현의 원칙을 고수하려 들었다면, 국가적으로 큰 피해가 생겼겠죠. 즉, 정치가 노무현의 원칙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국익을 위해 자신의 원칙을 저버릴 수 있는 용기가 최고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진보의 미래]에서 그는 “진보 진영도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수용의 정도를 갖고 타협할 것은 타협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라며 “대체로 제3의 길이 대세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럽의 진보주의 정부들, 이른바 제3의 길이라고 불리는 정권 아래서도 구조조정, 민영화, 아웃소싱,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개방 등을 받아들였다”고 피력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노무현은 2005년 7월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두 당이 실제로는 정책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며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죠. 당시 지지들과 여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그때 진보층 내부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진보 정권이 맞느냐는 정체성 논란까지 벌어졌고요.
 
앞서 설명한 노무현의 유연성 때문에 그는 ‘좌파적 신자유주의자’라는 별칭까지 얻었습니다. 그 스스로도 2007년 6월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참여정부는 시장 친화적이고개방 지향적인 정부다, 배타하지 않는 자주를 주장하는 실용적 진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보를 지향하되, 한·미 FTA처럼 국익에 도움되는 결정을 유연하게 내릴 수 있는 실용주의적 자유주의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의견이 서로 다른 이들과의 치열한 토론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논쟁이 있는 곳일수록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습니다. 일각에서 ‘토론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그때문이었죠. 정권 초기 검사와의 대화도 마찬가집니다. 당시 검사들이 강금실 법무부 장관 임명에 반발하자 2003년 3월 10명의 검사와 정말 격의 없이 생방송으로 TV 토론을 했습니다.
 
노무현의 소통 노력은 국경도 뛰어넘었습니다. 2003년 6월 일본 방송에 출연해 대학생과 직장인, 주부 등과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반일이 아니면 친일로 모는 현 정부 아래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권변호사나 국회의원 시절에도 노무현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자유롭게 토론을 벌였습니다.
 
토론은 자유주의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처럼 토론을 통해서만 더 나은 생각과 아이디어 들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죠. 반면에 거짓되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주장은 토론을 통해 걸러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자유주의를 지키는 데 있어 가장 첫 번째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토론의 가장 큰 목적이고요.
 

비판 잘하지만 남의 비판엔 ‘발끈’

2015년 3월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대표 회동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발언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메모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2015년 3월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대표 회동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발언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메모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노무현 정신을 계승했다는 문재인 정부와 여권은 유독 다른 목소리에 배타적입니다. ‘민주당만 빼고’ 칼럼을 올렸던 임미리 교수는 여당으로부터 고발당했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비판적이었던 금태섭 전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한 것도 모자라, 공수처법 처리 시 기권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당시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기어이 금태섭의 목을 쳤다, 친문 팬덤 정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죠.
 
지난 3월 청와대를 비판했던 외신기자는 ‘댓글 테러’를 당했습니다. ‘X또라이X’ ‘나라 팔아먹을 X’ 같은 성차별적 발언부터 ‘토착왜구’ ‘매국노’ 등의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막말이 넘쳤습니다. 당시 해당 기자는 정부가 올린 전염병 대응 관련 질의응답 동영상을 인용하며 “그들(한국 정부)의 생각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외신기자’들이 잘려나갔는지(cropped out)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신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친일’ ‘친미’ 딱지가 붙으며 배신자·반역자 취급을 당한다”고 썼죠.
 
지난해 3월에도 블룸버그의 또 다른 기자가 문재인을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고 표현했다가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이해식 민주당 대변인)이라며 공격받았습니다. 이 사례는 지난 3월 미 국무부가 발간한 연례 인권보고서에도 주요 사례로 담겼습니다. “집권여당이 대통령을 북한의 ‘수석 대변인’이라고 표현했다는 이유로 블룸버그 기자를 비난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운명의 사슬로 깊게 엮여 있지만, 두 사람의 성격과 역사관, 가치 지향점은 매우 다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노무현은 진보를 표방했지만, 보수 정책을 도입할 만큼 유연한 사고를 가졌고, 국익 앞에서는 누구와도 타협할 수 있는 실용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다양한 생각과 이들 간의 조율을 통해 더 나은 결론을 맺는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죠.
 

문재인은 제2의 노무현이 아니다

2016년 11월 15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에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사태와 관련해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6년 11월 15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에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사태와 관련해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최근 진중권 전 교수와의 유튜브 대담에서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의 버전 2가 절대 아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노무현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민주주의를 믿고 있는 분들, 노무현을 좋아하는 분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 전 교수도 “지금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유지되는 것은 대통령 지지율 때문”이라며 “아직 40% 이상의 콘크리트 지지율이 있다, 이 지지율의 상당 부분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라고 이렇게 돼 있지만 두 사람은 철학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문재인 정부에) 노무현의 아우라를 씌워서 보고 있다”며 “그것이 빨리 걷어져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특히 “지금 대깨문·문파는 사실은 유사 파시즘이다. 이견을 내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집단으로 이지메(따돌림)를 한다, 그런 대깨문의 행태를 질문했을 때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다채롭게 하는 양념이라고 했다, 그때 뜨악했다”며 “노무현이라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노무현과 문재인의 특징은 지지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노사모는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탄핵 위기에서 열린우리당 창당의 공신이었습니다. 정권 출범 후엔 자신들의 정체성을 ‘노감모(노무현 감시 모임)’로 바꾸며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는 이들도 나왔고요.
 
그러나 문파는 다릅니다. 블룸버그 기자의 사례처럼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SNS로 가혹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 결과 지식인들의 입엔 자발적 재갈이 물려 건강한 비판마저 사라집니다. 앞서 진 전 교수가 지적한 ‘양념’ 사건처럼 문파에겐 같은 편도 생각이 다르면 적입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2017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문재인과 경쟁했던 안희정·이재명에게 비난 문자가 쏟아졌습니다. 친노의 핵심인 안희정조차 “질린다”고 했고, 현재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인 박영선도 “국정원 댓글부대와 동일선”이라며 비판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임 대표였던 김종인도 당시에 “히틀러 추종자가 연상된다”고 지적했고요.
 
그러나 당시 문재인은 ‘문자폭탄’ 사건에 대해 “경쟁을 흥미롭게 만드는 양념”이라며 지지자들을 감쌌습니다. 이후 ‘문빠’의 맹목적 지지는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문프께 모든 권한을 양도했다’와 같이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상대에 대한 공격과 폭력의 강도가 선을 넘기 시작했고, 부동산 발언으로 뭇매를 맞고 입장을 바꾼 진성준 의원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여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문재인의 가장 큰 모순은 촛불혁명을 통해 촛불정신을 계승한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촛불정신이 무엇인지를 놓고도 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한 가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문재인은 박근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죠. 현 정권의 실세와 그들 지지세력의 주장대로면 말입니다.
 
하지만 문재인에게서 박근혜의 그림자가 자꾸 보이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지난 7월 신성철 KAIST 총장이 정부의 무리한 고발로 검찰 수사를 받다 무혐의 처분 됐습니다. 검찰에 고발된 지 20개월만입니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됐고, 또 박근혜의 초등학교 동문에다 영남대 이사까지 지낸 탓에 적폐로 몰렸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정부의 검찰 고발 당시 과학계는 “문재인 정부가 학자들까지 무리하게 적폐로 내몬다”며 반발했습니다. 과학 잡지 [네이처]도 “한국 과학자들이 부당한 처사에 저항하고 있다”며 비중 있게 다뤘고요. 이와 비슷하게 현 정부 출범 후 임기를 못 채우고 옷 벗은 기관장만 한국과학창의재단·한국연구재단 등 12명입니다. 2018년 4월 임기 2년을 남기고 사퇴한 임기철 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은 “과기부 차관한테 ‘촛불 정권이 들어섰으니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죠.
 

어른거리는 ‘박근혜 그림자’

그뿐 아닙니다. 대학 구성원들이 뽑은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총장 자리를 비워두는 행태도 반복됩니다. 지난 2월 공주교대는 개교 이후 처음 직선제를 도입해 66.4%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이명주 교수를 추천했지만, 교육부가 거부했습니다. 구체적 이유는 밝히지 않았고요. 구성원들이 규탄 집회까지 벌였지만, 아직도 공석입니다. 과학과 학문의 영역까지 적폐로 모는 행태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와 무엇이 다른가요. 이들이 말했던 촛불정신이 이런 건가요.
 
실용보다 이념을 내세우고, 청와대에 갇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소통하지 않는 것은 문재인과 박근혜 모두 똑같습니다. 부동산 정책 실패를 지적하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현실과 괴리된 통계를 내밀어 집값이 잡히고 있다거나 지난 정부의 잘못 때문에 상승했다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또 2018년엔 통계청의 조사 결과 소득분배 실태가 나빠진 것으로 나오자 청장을 교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박근혜와 문재인 모두 친박과 친문, 태극기 부대와 문파 등 강력한 팬덤을 등에 업고 종교화된 정치를 펴는 것도 비슷합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일련의 상황들을 냉정히 살펴볼 때 문재인은 노무현보다 박근혜에 더욱 가깝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제2의 노무현이며 노무현의 그림자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문재인에겐 박근혜의 아우라가 보입니다.
 
젊은 문재인이 일상의 범인보다 정의를 위한 뜨거운 삶을 살았고, 기득권과 싸우며 약자의 편에 섰던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난 삶의 궤적이 좋은 정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죠. 대통령에 걸맞은 역량과 비전이 정치의 퀄리티를 좌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처럼 통치자는 일반 시민보다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2020년 첫 기자회견에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을 표명한 그에게 정의와 절제 공감과 같은 통치자로서의 탁월한 역량이 있는지 되묻습니다. 노무현의 그림자란 별명을 가장 좋아한다면서 왜 그는 자꾸만 반대로 가려는 걸까요.
 
※ 윤석만 논설위원/중앙일보 -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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