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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학도병 772명의 '기만술'…북한군 녹여버린 '장사상륙작전'

중앙일보 2020.09.20 11:50
지난 9월 15일은 1950년 6·25전쟁(국제적으론 한국전쟁으로 불림) 당시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그 뒤 보름  간의 혈전 끝에 28일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70주년을 맞아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고 거대한 역사를 이룬 영웅들의 의지와 신념, 지혜와 희생을 반추한다.  

상륙전 경험 맥아더의 발상이지만
미군에 국군·영국군 등 함께 싸워
미 해병대 로페즈 중위, 1호 전사
부상 입은 채 수류탄 몸으로 덮쳐
명예훈장, 학교 등 이름 붙여 기억
장사리·삼척·군산 등 공격해 기만술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희생 기억해야
철저 작전계획, 기습·기만으로 승리
인천도 노르망디식 국제행사 열어야
정상들 모여 함께 싸운 기억 공유해야
전체주의·전쟁 재발 막는 평화모임으로
김정은, "낙동강서 피눈물 삼키고 돌아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미 해병대의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가 가장 앞장서서 해안 방벽을 넘고 있다. 로페즈 중위는 적의 총탄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핀이 빠진 수류탄으로부터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전사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첫 전사자다. 로페즈 중위에겐 미군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사진=미 해군 역사센터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미 해병대의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가 가장 앞장서서 해안 방벽을 넘고 있다. 로페즈 중위는 적의 총탄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핀이 빠진 수류탄으로부터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전사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첫 전사자다. 로페즈 중위에겐 미군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사진=미 해군 역사센터

 

『콜디스트 윈터』『이런 전쟁』 최고자료

6·25 관련 기록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살림)와 한국전쟁의 숨은 역사를 치밀하게 밝힌 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플래닛미디어)을 주로 참고했다. 『콜디스트 윈터』는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대한 저술로 퓰리처상을 받았던 저널리스트·역사저술가인 핼버스탬이 2007년 남긴 유작이다. 『이런 전쟁』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역사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인 페렌바크가 1963년 펴내 미국 육군사관학교와 미 육군지휘참모대학의 필독서로 읽혔다. 이념이 아닌 역사적 고증과 냉철한 평가로 전쟁의 본질을 표현한 책이다.  
2019년 6월 5일 영국 남푸 포츠머스 항구에셔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 기념행사. 16개국의 지도자가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 찰스 왕세자, 엘리자베스 2세 여왕,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부부, 그리스의 프로코니스 파일로풀로스 대통령,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네덜란드의 마르크 뤼테 총리.AFP=연합뉴스.

2019년 6월 5일 영국 남푸 포츠머스 항구에셔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 기념행사. 16개국의 지도자가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 찰스 왕세자, 엘리자베스 2세 여왕,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부부, 그리스의 프로코니스 파일로풀로스 대통령,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네덜란드의 마르크 뤼테 총리.AFP=연합뉴스.

 

유럽,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국제평화 행사로 기념

유럽의 경우 1944년 6월 6일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리는 행사를 지금도 열고 있다. 지난해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을 맞아 당시 연합군이 출발했던 영국 남부 포츠머스 항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는 전 세계 16개국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찰스 왕세자와 테리사 메이 총리, 당시 영국을 국빈방문 중이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등 연합국 정상은 물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까지 자리를 함께했다. 크림반도 병합으로 유럽연합(EU)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AFP 통신에 따르면 영국에 이렇게 많은 외국 지도자들이 모인 것은 2012년 런던올림픽 이후 처음이다. 별도로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에는 각국 각료급 인사들이 모여 추모 꽃다발을 바쳤다. 비인륜적인 나치즘과 파시즘에 맞서 모두가 함께 손잡고 싸웠던 역사를 반추하는 자리다. 전쟁의 비극을 상기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국제행사다. 평화는 함께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인천상륙작전 관련 행사를 국제적인 반전체주의 투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평화를 다짐하는 국제행사로 치를 필요가 있다.  
북한군의 침략전쟁에 사용한 소련제 T-34-85 전차가 파괴된 채 도로에 멈춰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북한군의 침략전쟁에 사용한 소련제 T-34-85 전차가 파괴된 채 도로에 멈춰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팔로군 출신 북 지휘관, 낙동강전투 주도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은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서울 수복’ 장을 1950년 9월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로 시작한다.  
“군사사에서 이에 비견될 수 있는 작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빛나는 작전이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8월까지 힘겨운 방어 작전을 수행했다. 북한군은 1930~40년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소속됐던 최용건 총사령관과 김웅 1군단장,  김무정 2군단장이 작전을 지휘했다. 중국 공산당이 항일전을 벌일 당시 중국공산당원으로서 활동했던 조선인의 상당수가 6·25 침략전쟁에서 북한군의 핵심을 맡았다. 중공군은 조선인 부대들을 통째로 북한에 보내 김일성에게 6·25전쟁을 일으킬 병력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1950년 10월 한반도 북부에 파병해 김일성 정권을 연명할 수 도왔다. 전쟁을 거의 3년간 더 끄는 데도 일조했다.  
중국공산당은 항일전의 동지가 아니라 6·25의 공범이다. 그들을 항일전 동지로 부르는 것은 북산의 시각일 뿐이다. 당시 중국의 항일전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세력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중화민국이었다. 장 총통의 국민당 정권은 항일전 이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 본토를 잃고 1949년 대만으로 옮겼다. 대한민국은 항일전쟁을 함께 했던 중화민국과 1992년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1952년 가을 철원 상감령 전투가 끝난 뒤 중국의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ㆍ왼쪽)와 함께 오성산 지역을 둘러보는 북한군 부사령관 최용건(왼쪽 둘째). 왼쪽 셋째는 북한 정치보위상 박일우. 중국과 북한은 상감령 전투를 6.25전쟁 ㅌ최대 전투로 기억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013년 6월 오성산에 오른 것도 이러한 침략 전쟁 기억 반추의 정치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진 김명호]

1952년 가을 철원 상감령 전투가 끝난 뒤 중국의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ㆍ왼쪽)와 함께 오성산 지역을 둘러보는 북한군 부사령관 최용건(왼쪽 둘째). 왼쪽 셋째는 북한 정치보위상 박일우. 중국과 북한은 상감령 전투를 6.25전쟁 ㅌ최대 전투로 기억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013년 6월 오성산에 오른 것도 이러한 침략 전쟁 기억 반추의 정치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진 김명호]

 

낙동강 북한군, 포로 학살·고문·거세까지

낙동강 전선의 상주-대구 회랑에서는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이 필사적으로 고지를 방어하는 동안 미군 25사단 27보병연대가 야습해오는 북한군을 저지했다. 미군은 8월 16일 B-29 폭격기 98대를 동원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게 융단폭격을 가했지만 효과는 미지수였다. 융단폭격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에서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전세를 뒤집을 전술적 수단은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의 잔학행위가 발견됐다. 왜관 근처 303고지를 점령한 미 5기병연대는 북한군의 잔학행위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포로가 된 중화기중대 박격포 사수 26명이 등 뒤에서 소련제 기관단총을 맞고 집단 학살된 것을 발견했다. 이들의 손은 등 뒤로 돌려져 주리나 전선으로 묶여있었다. 발견된 미군 시신 중에는 처형당하기 전 불에 탄 뒤 거세당한 경우도 있었고, 혀가 뽑힌 경우도 있었다. 일부는 가시철조망으로 머리와 입까지 묶여 있었다. 이런 야만 행위를 지시한 북한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와 공산 통치를 거치면서 서구식 규범 대신 일본군과 공산당식 고문과 즉결처형 등 잔학행위에 익숙해진 탓으로 볼 수 있다. 반인륜적 범죄로 고발해야 할 비인륜적인 잔혹 행위다.  
2016년 현충일을 맞아 미8군 제2보병사단과사단법인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는 함께 6일 부산 남구 UN기념공원에서 '낙동강 전투 전승 기념행사 및 카투사 전몰용사 추모제'를 개최했다.행사에 참가한 시어도어 마틴 주한미군 2사단장(소장,왼쪽)이 참배하고 있다.유엔기념공원에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카투사 전사자 유해 36구가 안장돼 있다.[중앙포토]

2016년 현충일을 맞아 미8군 제2보병사단과사단법인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는 함께 6일 부산 남구 UN기념공원에서 '낙동강 전투 전승 기념행사 및 카투사 전몰용사 추모제'를 개최했다.행사에 참가한 시어도어 마틴 주한미군 2사단장(소장,왼쪽)이 참배하고 있다.유엔기념공원에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카투사 전사자 유해 36구가 안장돼 있다.[중앙포토]

 

김정은, “낙동강가에서 피눈물 삼키고 돌아섰다”

이런 낙동강 전투에 대한 북한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정전 기념일인 7월 27일 평양의 4·25 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회 전국노병대회 연설에서 놀라운 발언으로 낙동강 전투를 언급했다. 김정은은 “우리는 총이 부족해 남해를 지척에 둔 락동강(낙동강)가에 전우들을 묻고 피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던 동지들의 한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을 누르고 부산까지 점령하지 못한 것에 대한 통한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국방력 강화 의지를 강조하고 핵 개발을 과시했다. ‘총’만 있으면 다시 남침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뒤 패주한 북한구이 방치한 소련제 야포가 지게, 주전자 , 앵동이 등과 함께 뒹굴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과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뒤 패주한 북한구이 방치한 소련제 야포가 지게, 주전자 , 앵동이 등과 함께 뒹굴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과소,

 

6·25전쟁 남침 사실조차 부인하는 북한

북한은 남침 사실조차 인정하길 거부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날 6·25전쟁에 대해 “미국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야수성 침략자들과의 싸움”이라며 “수령과 노병들이 이런 미제로부터 조국을 지켰다”고 주장했다. 6·25전쟁이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사실은 수많은 연구와 발굴된 역사 자료를 통해 이미 명명백백하게 확인됐음에도 북한은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다급해진 북한은 김포공항에 주기한 소련제 야크 전투기를 그대로 두고 달아났다. 6.25전쟁은 김일성의 발상과 간청, 소련 스탈린의 승인, 중국 마오저둥의 동의 아래 이뤄진 공산 세력의 침략전쟁으로 시작됐다. 사진=미국 국립무서보관ㅅ

인천상륙작전으로 다급해진 북한은 김포공항에 주기한 소련제 야크 전투기를 그대로 두고 달아났다. 6.25전쟁은 김일성의 발상과 간청, 소련 스탈린의 승인, 중국 마오저둥의 동의 아래 이뤄진 공산 세력의 침략전쟁으로 시작됐다. 사진=미국 국립무서보관ㅅ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러시아가 한국에 넘겨준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아직 때가 이르다”라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48차례나 번이나 거듭 요청해 끝내 허가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 뒤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하자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도 남침에 동의했다. 소련은 대대적인 무기 지원은 물론 작전 계획까지 제공해 북한이 이에 따라 기습 남침했다. 이는 1994년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한 300여 종의 문서와 러시아 대통령실이 소장하던 1200쪽의 문서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 문서에는 북한의 남침 준비 일정까지 소상하게 기록됐다. 6·25전쟁이라는 한국사의 비극이 김일성의 발상과 간청, 소련의 승인, 중국 공산당의 동의와 지원으로 발발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이 인천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이 인천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소모전 타개하고 전쟁 조기종식 위한 상륙작전

이렇게 발발한 6·25전쟁, 이렇게 진행된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악전고투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대구에 40만이 넘는 피란민이 모이자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갔다. 이미 6월 29일 미국에 이어 둘째로 참전을 선언했던 영국이 8월 말 홍콩에 있던 27여단 병력을 부산항에 보냈다. 다국적 유엔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런데도 낙동강 전선의 주도권은 9월 초까지 북한군이 여전히 쥐고 있었다.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소모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소모전은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본국에서 유엔군 철수 여론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상황을 타개할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이 거론됐다.  
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태평양 전쟁 당시 수없이 사용해 익숙했던 전술이었다. 맥아더는 1943년 11월 마샬 군도의 타와라, 1944년 6~9월의 미국령 괌 전투, 9~11월의 마리아나·팔라우 군도의 페렐리우, 10~11월 필리핀의 레이테, 1945년 2~3월 일본령 이오지마, 4~6월 오키나와에서 상륙작전을 벌여 일제를 태평양에서 몰아냈다.  
맥아더는 1950년 7월 첫 주, 참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에게 한국 서해안에 상륙하는 작전 준비를 지시했다. 우세한 항공·해상 전력과 특수 작전 능력을 지닌 강인한 해병대를 상륙시켜 적 후방을 장악하고 보급선을 끊어 적을 격멸하고 전쟁을 일찍 끝내려는 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주리함(사진 이래)을 비롯한 함선들 상공을 미 해군의 코르세어기가 날고 있다. 사진=미 해군 역사센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주리함(사진 이래)을 비롯한 함선들 상공을 미 해군의 코르세어기가 날고 있다. 사진=미 해군 역사센터

 

미군뿐 아니라 국군과 영국·캐나다·프랑스도 상륙

『콜디스트 윈터』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맥아더의 마지막 성공작”이라며 “기지가 돋보이는 작전이 동시에 위험한 도박”이라고 평가했다. 대담하고 독창적인 데다 예상 밖의 행동을 서슴지 않고 일반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거부하는 맥아더의 장점에 행운이 따른 결과라는 평가다. 해군 등이 조수간만의 차이를, 육군은 병력 부족을 이유로 작전에 회의적이었다. 이를 밀어붙인 것은 맥아더였다.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배경 속에서 기획되고 실행됐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선 몇 가지 오해가 있다. 그 하나가 미군과 맥아더의 작전이라는 인식이다. 맥아더가 밀어붙이고 미군이 작전을 짠 것은 사실이다.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으로 이뤄진 10군단이 주공을 맡고 미 해군과 공군이 지원한 것도 맞다. 하지만 유엔군의 일원인 국군과 영국군·캐나다군·프랑스군도 함께 싸웠다. 인천상륙작전은 다국적군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투인 셈이다.  
1950년 9월 미군 전투기가 전북 이리(현재 익산) 상공에서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군산, 삼척, 장사 등에서 이뤄진 기만작전의 하나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1950년 9월 미군 전투기가 전북 이리(현재 익산) 상공에서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군산, 삼척, 장사 등에서 이뤄진 기만작전의 하나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장사상륙, 삼척·군산 포격·폭격 등 기만작전

인천상륙작전이 적의 허를 찌르는 상륙작전이라는 기발한 작전이며 성공했다는 사실에 묻혀 이 작전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계획되고 진행됐는지가 비교적 덜 알려졌다는 점도 있다.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북한 침략군이 작전 의도를 짐작할 수 없도록 철저한 사전 기만작전으로 허를 찔렀다. 미 해군은 1945년 도쿄만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던 전함 미주리함을  동원해 강원도 삼척을 포격해 상륙 기만작전을 펼쳤다. 상륙작전에 앞선 공격인 듯 보이기 위해 전북의 항구도시 군산을 포격하고 교통 요지 이리(현재 익산)를 공습해서 적을 혼랍스럽게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항구에 정박한 미군 LST.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항구에 정박한 미군 LST.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특히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9월 4~15일 인천을 계속 공습하고 포격하면서 적을 마지막으로 헛갈리게 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된 15일에는 동해의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 학도병을 중심으로 하는 772명의 병력이 상륙해 양동 기만작전을 펼쳤다. 상륙 병력은 엿새에 걸쳐 악전고투 끝에 전사자 139명과 부상자 92명이라는 희생을 치렀다. 현장에는 영덕군이 만든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이 호국 성지로 조성돼 있다. 학도병의 투혼은 2019년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라는 영화에서 재현됐다. 학도병들은 결코 잊힌 영웅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쟁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이들의 나라 사랑은 21세기까지 울림을 준다.
이런 다양한 기만작전에 속았는지 인천에 유엔군 4만 명이 상륙할 당시 북한군은 인천에 불과 6500명 정도의 소수 병력과 19대의 항공기, 1대의 정찰선만 남겼을 뿐이다. 유엔군은 그 뒤 모두 합쳐 7만5000명의 병력을 인천에 투입해 인천에 이어 김포공항과 서울수복 작전을 펼쳤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222명의 전사자와 809명의 부상자라는 희생을 치렀다. 북한군은 1350명이 사살됐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작전 등을 통틀어 상륙 뒤 1달 안에 13만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북한군은 군대 속어대로 인천상륙작전으로 ‘녹아버렸다’.  
인천상륙작전의 첫 전사자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 25세에 전사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인천상륙작전의 첫 전사자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 25세에 전사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인천상륙작전 1호 전사자 로페즈 중위

하지만 상륙이라는 기습작전과 전과만 보고 인천상륙작전이 그리 치열하지 않은 전투였거나 미군이 압도적인 해군과 공군력으로 건성으로 싸운 것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북한의 치열한 방어전에 맞서 유엔군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을 수복하는 데 2주가 걸렸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유엔군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전투였으며, 필사적인 작전이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는 인물이 인천상륙작전의 미 해병대 1호 전사자인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다. 당시 25세였던 로페즈 중위는 인천에 상륙한 뒤 해병 1사단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서 부하들을 이끌었다. 그는 가장 앞장서서 해안 방벽을 사다리를 타고 넘어가다 적의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가 방벽을 넘어가는 뒷모습은 사진으로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이 날아들자 주변의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이를 덮쳤다. 장렬한 희생이었다. 당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방송사인 스크립스하워드의 종군기자였던 제리 소프는 로페즈의 전사를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 용기있는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로페즈에게는 미군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이 추서됐으며 가족들이 이를 받았다. 스페인 이민 2세로 플로리다 탬파에서 태어난 그를 기리는 기념물은 미국에서 7개 이상이다. 학교와 주립 요양원, 한국전쟁 기념 스포츠 센터, 공공 수영장, 미군 수송선 등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스포츠센터에는 그가 전사한 인천 해변에서 가져온 돌이 놓였다. 미 해군 사관학교 시절 그가 지냈던 기숙사 3021호는 그의 사진과 명예훈장 공적 내용이 전시되고 그에게 헌정됐다.
인천상륙잔전을 지켜보는 맥아더와 참모들. 사진=미국 국림문서보관소

인천상륙잔전을 지켜보는 맥아더와 참모들. 사진=미국 국림문서보관소

 

의지와 신념의 승리, 의미와 가치 기억해야

이처럼 인천상륙작전은 공산 침략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의지, 이길 수 있다는 신념, 군사작전 경험과 지혜, 그리고 군인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이 이룩한 군사적인 성공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역전의 전기를 만든 창의적인 전투였다. 인천상륙작전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그 뒤 북진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을 다시 내주는 1·4 후퇴를 겪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의 위기에서 구한 운명적인 전투였다. 번영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결정적인 순간의 하나다.  
2019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을 기념해 모인 16개국의 지도자와 영국 왕족들.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 행사는 나치에 함께 맞서 싸운 기억을 공유하며 전쟁과 전체주의의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국제평화 행사로 승화됐다. AP=연합뉴스

2019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75주년을 기념해 모인 16개국의 지도자와 영국 왕족들.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 행사는 나치에 함께 맞서 싸운 기억을 공유하며 전쟁과 전체주의의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국제평화 행사로 승화됐다. AP=연합뉴스

역사적 견인차가 된 인천상륙작전을 국제적인 평화행사로 기억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올해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해군 차원의 행사로 끝났지만 코로나가 잠잠해진 뒤에는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격에 걸맞은 국제적인 기념행사가 필요하다. 공산 침략군에 대항하기 위해 4만 명의 유엔군 병력이 상륙한 인천상륙작전은 나치 전체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15만6000명의 연합군 병력이 상륙하고 19만5700명의 해군이 지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다. 하지만 그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는 절대 작지 않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를 증명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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