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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0에서 출발 ‘조연’ 김광현, 0점대 짠물투로 ‘주연’ 우뚝

중앙선데이 2020.09.19 00:21 704호 25면 지면보기

MLB에 연착륙 ‘올드 루키’

세인트루이스 선발 김광현이 15일(한국 시간) 밀워키를 상대로 투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세인트루이스 선발 김광현이 15일(한국 시간) 밀워키를 상대로 투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여곡절 끝에 메이저리그(MLB)에 데뷔한 김광현(3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이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2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0.63을 기록하고 있다. 24이닝 동안 자책점을 한 점도 내주지 않는 호투를 펼치자 미국 현지에서는 올 시즌 신인왕 후보로 그의 이름을 들먹일 정도다.

23년 만에 변두리 선수 첫 경험
첫 임무도 낯선 불펜 투수 보직
외로움·부상 딛고 선발 기회 잡아

다양한 슬라이더, 송곳 제구 위력
5경기 평균자책점 0.33 역대 2위
신인상, PS 등판 등 꽃길 기대감

 
9세 때 야구를 시작한 김광현은 타고난 ‘스타’였다. 그의 모교인 안산공고는 김광현의 활약 덕분에 ‘광현공고’로 불릴 정도였다. 고교를 졸업한 김광현은 2007년 SK 와이번스 사상 최고 계약금(5억원)을 받고 프로야구에 발을 디뎠다. 김광현은 당시 SK를 이끌었던 김성근(78) 감독의 눈에 들었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SK 왕조의 황태자로 군림했다. 2008년에는 16승4패, 평균자책점 2.39를 기록하며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SK에서 13시즌을 보내면서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만 4개를 가져갔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주인공이었다.

  
나 혼자 산다 “너무 외롭고 힘들다”

 
올해 미국으로 건너간 김광현은 야구 인생 23년 만에 처음으로 조연으로 밀려났다. ‘꿈의 무대’로 불리는 MLB 입성에 성공했지만, 그곳에서 김광현은 무수히 많은 신인 투수 중 한 명일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챙기고 준비해야 했다. 김광현은 “다시 0에서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미국 생활은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범경기에서 시속 150㎞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뽐낸 덕분에 선발투수 등판 가능성을 높였다. 그런데 지난 3월 미국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스프링캠프가 중단됐다. 올해 MLB 정규시즌 개막도 연기됐다. 한국으로 복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미국에 남아 훈련을 계속했다.

 
김광현은 스프링캠프지인 미국 플로리다주 주피터에 머물다 세인트루이스로 이동해 개인 훈련을 이어갔다. 주변엔 아는 이들이 없었고, 훈련 환경도 조성되지 않은 낯선 환경이었다.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가족을 데려가지도 못했다. 오죽 힘들었으면 스스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어떠한 시련이 있어도 잘 참고 견뎌낼 줄 알았다. 예상치 못한 일들에 부딪히는 건 정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세인트루이스 구단은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김광현을 인상 깊게 지켜봤다. 그리고는 통산 167승을 올린 베테랑 투수 애덤 웨인라이트(39·미국)를 김광현의 훈련 파트너로 붙여줬다. 김광현은 “만약 웨인라이트가 없었다면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며 구단에 감사의 뜻을 밝혔다. 지난 7월 말 MLB 정규시즌 개막이 확정되면서 김광현의 꼬인 빅리그 생활도 술술 풀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선발투수 보직을 얻지 못하고 마무리투수 임무를 맡았다. 그로선 새로운 도전이었다.

 
김광현을 격려하는 웨인라이트(오른쪽). [연합뉴스]

김광현을 격려하는 웨인라이트(오른쪽). [연합뉴스]

프로야구 선수가 된 뒤 김광현은 줄곧 선발투수로 뛰었다. 평생 선발투수로서 몸 관리를 하고 경기 준비를 했던 김광현이 불펜투수로 변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존의 준비 루틴을 모두 바꿔야 했다. 그는 “팀 승리에 기여할 수 있다면 선발이든 구원이든 중요치 않다”고 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불펜투수의 삶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7월 25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MLB 개막전에서 9회 마무리 투수로 나섰지만, 안타 2개를 맞으면서 힘겹게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인트루이스 구단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했다. 그 과정에서 선발투수가 2명이나 빠지게 됐다. 김광현은 바로 선발 투수진으로 합류했다. 그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달 18일 시카고 컵스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한 그는 3과 3분의 2이닝 동안 1점만 내주고 역투했다. 당시 얼마나 긴장했는지 1회엔 훈련용 모자를 쓰고 마운드에 올랐을 정도였다. 더구나 송진을 담은 로진백은 마운드에 두고 더그아웃에 들어갔다. 그는 “오랜만에 선발투수로 나가는 경기라 긴장이 됐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김광현은 선발투수를 맡은 뒤 2승을 거뒀다. 그러나 또 악재가 터졌다. 김광현은 지난 5일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복통을 호소해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검진 결과 신장 경색(renal infarction) 진단을 받았다. 신장 경색은 신장으로 피를 공급하는 혈관에 문제가 생기는 질환이다. 김광현은 10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지난 7일 예정됐던 컵스전 등판은 취소됐다.

 
올해 MLB 정규시즌은 코로나19로 인해 팀당 60경기로 초미니 시즌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칫하면 시즌을 접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 그는 다시 일어섰다.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바로 캐치볼을 시작했고, 13일 만에 마운드에 돌아왔다.

 
김광현은 건강한 모습으로 지난 15일 밀워키 브루어스전에 등판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컸다. 김광현이 경기 도중 볼 배합과 관련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 포수를 불렀는데 놀란 트레이너가 황급히 달려나가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김광현은 웃으면서 “돈 워리(Don’t worry)”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날 MLB에서 처음으로 7이닝을 던지면서 무실점으로 막았다. 올 시즌 평균자책점은 0.83에서 0.63으로 내려갔다. 선발로 나온 5경기의 평균자책점은 0.33이다. 1913년 이후 새내기 투수로는 평균자책점 2위(데뷔 이후 선발 5경기) 기록이다. 1위는 페르난도 발렌수엘라(1981년 LA 다저스)의 0.20이다.

 
김광현, 2020 MLB 선발일지

김광현, 2020 MLB 선발일지

김광현은 지난 2014년에도 MLB에 도전한 적이 있다. 그때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빠른 직구에 슬라이더만 던질 수 있는 ‘투피치 투수’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후 김광현은 커브,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종을 익혔다. 다양한 공을 섞어 던지면서 그의 주무기인 슬라이더가 더욱 강력해졌다. 올해 MLB에선 삼진을 17개 잡았는데, 결정구는 대부분 슬라이더였다. 시속 121㎞의 느린 슬라이더부터 시속 141㎞짜리 고속 슬라이더까지 구속 변화를 준 데다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송곳 제구까지 잘되고 있다.

  
빠른 피칭 템포로 맞혀 잡는 투구

 
KBO리그에서 김광현은 위기에 몰리면 힘으로 타자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투구 수가 많아지고 멘털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고민하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던진다. 빠른 공 속도는 140㎞대 초반에 머물고 있지만, 맞혀 잡는 투구로 피칭 템포가 한층 빨라졌다. 투수 출신인 손혁 키움 히어로즈 감독은 “김광현의 투구 타이밍이 빠르다 보니 세인트루이스 야수들도 수비에 집중해서 어려운 타구를 잘 잡아주고 있다”고 했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김광현은 ‘제구의 달인’ 류현진(33·토론토 블루제이스)처럼 구석구석에 영리하게 던지면서 빅리그 연착륙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신인상 수상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세인트루이스 구단은 SNS를 통해 김광현의 호투 소식을 전하면서 “올해의 신인상?”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이제까지 한국 선수가 MLB에서 신인상을 받은 경우는 한 명도 없다. 세인트루이스가 상승세를 타면서 김광현은 오는 30일부터 열리는 포스트시즌에서 활약을 예고하고 있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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