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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철의 시선] 공정·검찰개혁·피해자…오염되는 말들

중앙일보 2020.09.17 00:27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지난해 12월 전북 전주시의 한 웨딩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저자는 당시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이었던 이상직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단 본사가 있는 경남 진주가 아닌 전주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총선용이었다. 6000명씩이나 모인 축하객 중에는 송영길 민주당 의원, 송하진 전북지사,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등 중량급 인사도 적지 않았다.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와 유은혜·박영선 장관 등 참석 못 한 정치인들은 영상 인사를 보냈다. 그가 낸 책의 이름은 무려 『공정』이었다.
 

이상직이 책 이름에 쓴 ‘공정’
‘검찰개혁’은 조롱 대상 전락
권력자 합리화에 동원돼 오염

선거용 출판이 대체로 그렇듯, 200페이지 남짓한 책에는 자기 자랑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펀드매니저로 일하며 조언을 해주던 상장기업 회장이 회사를 인수해 달라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회사가 간판을 내리지 않고 오래 유지되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 생각하네.” 이 의원은 그 회사를 인수한 뒤 주가 조작에 이용하고, 아들 골프코치, 전처까지 직원으로 이름을 올려 돈을 빼돌렸다. 횡령 사건을 책임지고 법정에 선 이 의원 형 판결문에는 “빼돌린 돈의 대부분이 동생(이 의원)에게 간 것으로 보인다”고 적시됐다.
 
책을 낼 무렵 그가 세운 이스타항공을 제주항공에 매각하는 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이 의원은 이미 5년 전 스물여섯, 열아홉 살 남매가 자본금 3000만원으로 세운 페이퍼 컴퍼니에 지분을 넘겼다. 인수대금 100억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매각이 성사되면 자녀들에게 200억원 대의 이익이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이스타항공은 4대 보험료와 임금이 밀리기 시작했다. 5억원의 고용보험료를 내지 않아 직원들은 정부의 지원금도 받지 못했다.
 
결국 매각도 무산됐다. 이 의원은 가족 명의 지분을 회사에 헌납한다고 밝혔다. 대주주 책임론을 모면하려는 꼼수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뒤 이스타는 직원 600여 명을 정리해고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알리는 책 이름으로 ‘공정’을 선택했다. 심각한 말의 오염이다.
 
공정이라는 말은 본래 치우치지 않고 고른 ‘공평’을 넘어 올바르다는 뜻까지 포함한다. 많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 문구(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에서 공정은 과정에 필요한 조건으로 선택됐다.  
 
물론 공정이라는 말은 이미 조국 전 장관 때부터 심각하기 오염됐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부모의 지위를 자녀 입시용 스펙을 쌓는 데 스스럼없이 썼다. "이게 공정하냐”는 국민들의 외침에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했다. 과격한 지지자는 “조국 같은 초엘리트들 사이에는 불법적이지는 않지만, 특혜 같은 게 있을 수 있다”고 두둔했다. 입만 열면 공정을 부르짖던 사람들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공정은 ‘특권층의 보호막’ 정도로 읽히게 됐다.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휴가 미복귀 논란에서 다시 불거진 공정 논쟁은 뒤바뀐 용어의 뜻을 한층 분명히 했다.
 
이 정부 들어 심각하게 오염된 말 중 으뜸은 ‘검찰개혁’일 것이다. 추 장관은 아들 휴가 미복귀 의혹을 들어 사퇴 의사를 묻는 야당 의원에게 “검찰개혁은 저에게 부여된 운명”이라고 답했다. 추 장관을 감싸는 여당 의원들도 말끝마다 검찰개혁을 빼놓지 않는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검찰개혁에 저항세력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하도 이런 동문서답에 동원되다 보니 이제 조롱의 대상이 됐다. ‘조국 흑서’의 공동저자인 서민 단국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반려견이 요에 배설해 맨바닥에서 자야 한다. 검찰개혁이 필요한 이유”라고 비꼬았다. 칼럼니스트 진중권은 “면죄부, 뭐든 해도 용서가 되는 부적”이라고 용어를 재정의했다. 검찰개혁은 모든 정권이 추구했으나 아직도 화두로 남은 과제다. 이 말에 담긴 무게감을 생각할 때, 이런 식의 희화화는 가슴 아프다.
 
최근에 오염된 또 다른 말은 피해자다. 남의 부당한 행동 때문에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은 사람을 칭하는 이 말에선 아픔이 느껴진다. 특히 피해를 내놓고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애잔한 정도가 더하다. 하지만 이 정권의 실력자들이 저지른 성폭력 사건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실력자들과 그 추종세력은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란 말로 슬쩍 바꿔 뭔가 음험한 이미지를 덧씌우려 했다. 얼마 전 한 공영방송은 신입사원 선발 시험에 이 말의 의미를 묻는 시험을 내, 오염된 말을 공식화하려 시도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곱고 바르고 좋은 말들의 의미가 뒤바뀔지 모르겠다. 아! 바른 말 고운 말, 그리고 정확한 말을 쓰고 싶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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