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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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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김정은도 전기차·반도체 공장을 현지지도할 수 있으려면…

중앙일보 2020.09.17 00:23 종합 25면 지면보기

수해 복구에 올인하는 김정은의 속사정

김정은 국무위원장(왼쪽)이 황해북도 강북리 태풍 피해 현장을 현지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15일 보도했다. 복구된 살림집(주택) 내부를 살펴보는 김 위원장 뒤편에 보이는 철제 손잡이까지 황토색 페인트로 칠해진 방문이 낡고 조잡해 보인다. [조선중앙TV 캡처=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왼쪽)이 황해북도 강북리 태풍 피해 현장을 현지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15일 보도했다. 복구된 살림집(주택) 내부를 살펴보는 김 위원장 뒤편에 보이는 철제 손잡이까지 황토색 페인트로 칠해진 방문이 낡고 조잡해 보인다. [조선중앙TV 캡처=연합뉴스]

북한을 제대로 알아가는 첫 발걸음은 겉과 속이 다른 체제 속성을 간파하는 것이다. 노동당 일당 독재와 세습통치의 폐해는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다 오른 방북길에서, 철저히 교육받은 안내원(감시원)의 어깨너머로 본 번듯한 모양새를 북한 체제의 속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노동신문 꽤나 탐독했다며 책상에서 배운 지식을 내세워 북한 전문가연 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20대 청년·학생 시절 주체사상에 미혹된 후 헤어나지 못하고 반백 너머까지 그 섬망에서 못 벗어난 인사들이 우리 사회와 권력 곳곳에 포진해 있는 건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정은 ‘선물 주택’에 재활용 자재
한계 이른 북 경제의 민낯 드러내
협동농장·양계장만 찾아선 한계
비핵화와 개혁·개방 결단 내려야

북한의 그럴듯한 말이나 연출된 영상, 선전·선동에 이끌리기보다 그 속내와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요즘 수해 복구 현장을 잇달아 찾아 ‘애민(愛民)’ 메시지를 쏟아내는 김정은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그제 관영 선전 매체인 조선중앙TV로 공개된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행보에서는 북한 체제의 표리부동이 적나라하게 감지된다. 태풍 피해를 본 황해북도 강북리를 찾은 김 위원장은 북한군이 동원된 복구 현장을 둘러봤다. “(인민군 장병의) 헌신과 고생 앞에 머리가 숙여졌다”는 김정은의 발언에서 군에 대한 두터운 신뢰가 묻어난다. ‘믿을 건 군대뿐’이란 인식이다.
  
드론까지 띄워 수해 복구 현장 보여줘
 
피해 현장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살펴보던 김 위원장은 새로 건설된 살림집 지구를 돌아보면서 “부유하고 문화적인 사회주의 농촌으로 전변시키기 위한 책임적이고도 중요한 사업에 국가적인 지원을 대폭 증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붉은색 지붕에 단층과 복층으로 지어진 건물 50여 동을 돌아보면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여기까지의 말과 행동으로만 보면 마치 1960~70년대 한국의 새마을운동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당대 우리 국가의 리더십 형상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주택 내부로 들어가면서 나타났다. 거실과 화장실·부엌 등을 돌아보며 찬장과 아궁이 등을 돌아보는 김 위원장을 쫓는 카메라의 앵글에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집안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겼다. 그런데 방문짝이나 창틀 등의 모습은 새로 지은 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낡고 조잡해 보였다. 수해 현장에서 무너진 집을 정리하며 떼어온 것이거나 다른 지역의 것을 재활용하는 듯했다. 문짝은 철제 손잡이까지 모두 황토색 페인트로 새로 칠해져 있었다. 이례적으로 드론까지 띄워 촬영한 복구 현장의 원경(遠景)과 근접 촬영의 장면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김정은이 직접 챙기며 주민에게 공언한 ‘선물 주택’의 문짝 하나 제대로 만들기 어려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북한 경제의 민낯이 드러난 순간이다.
 
이런 실상은 여타 지역의 수해 복구 현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12일(보도 기준) 김정은이 방문한 황북 은파군 대청리 홍수 피해복구 현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속을 들여다보면 헙수룩한 수해 복구 민생 챙기기 쇼에 불과하다는 게 확인된다.  
 
그런데도 김 위원장은 여전히 수해 복구에 올인할 기세다. 그가 노동당 간부회의나 현장 방문 때 쏟아내는 말을 헤아려보면 올해 들어 자신이 내놓은 정책 노선이나 야심 찬 프로젝트가 모두 물거품이 된 걸 이참에 벌충하겠다는 기세다. 자칫 민심 이반을 부를 수 있는 재난 상황을 적극 활용해 간부들에 대한 책벌과 신속한 복구 지시, 현장 지휘 등으로 ‘민생 챙기기’ 코스프레에 나선 분위기도 감지된다.
  
파산한 김정은의 ‘정면돌파전’ 승부수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 이후 김정은이 품었을 자괴감과 상실감은 최근 잇달아 발간되는 미국 전직 고위 관료와 저널리스트의 관련 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판문점에서의 문재인-트럼프-김정은 회동은 그 ‘끝판왕’이라 불릴 만하다. 12월 워싱턴을 향해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를 위협했지만, 노회한 사업가 트럼프와 미 고위 관료들은 그것이 김정은의 가쁜 숨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무기력감 속에 결국 김정은이 선택한 건 2020년 한 해를 이른바 자력갱생과 정면돌파전으로 버텨보자는 것이었다. ‘농사만 어느 정도 잘돼서 식량 문제만 풀리면 버틸 수 있다’는 취지의 김정은 신년 벽두 언급은 왠지 불안했다. 북한의 현실을 외면한 호기 부리기 수준의 분위기가 감지된 때문이다.
 
빨간불은 곳곳에서 켜졌다. 기초체력이 바닥난 경제는 이른바 ‘인민 경제 4대 부문’으로 불리는 전력·석탄·금속·철도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미처 시동이 걸리기도 전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라는 악재가 덮쳤다. 열악한 보건·의료망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북한은 중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 통하는 육해공 교통로를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이 주도해온 대북제재가 지속하는 상황에서 산소호흡기 역할을 해온 북·중 밀무역 루트까지 막는 말 그대로 ‘셀프제재’였다. 2500만 인구 중 핵심만 모인 평양의 300만 인구까지 동요 조짐을 보이자 김정은이 노동당 회의 안건으로 이들의 생활 보장 문제를 올리는 상황까지 연출됐다.
 
결국 그의 올해 경제 청사진은 지난 8월 사실상 파국을 맞았다. 지난달 19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7기 6차 전원회의에서 “계획되었던 국가 경제의 장성 목표들이 심히 미진되고 인민생활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했다”는 고백을 해야 했다. 이후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잇달아 열린 노동당 관련 회의에서도 ‘전면적 수정’ 등의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완주는커녕 3분의 2 지점도 넘지 못한 중도하차다.  
 
3월 자신이 착공식 연설을 하며 직접 첫 삽을 떴던 평양종합병원 건설도 난관에 봉착해 내달 10일 노동당 창건 75주에 문을 열려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야심 차게 건설에 들어갔던 원산 해양리조트는 아예 북한 관영 매체에서 실종상태다.
  
핵·미사일 기술자를 첨단산업 인력으로
 
수해 현장을 찾아 주민을 위로하고 복구에 투입된 군인 건설자들을 격려하는 건 나무랄 일이 아니다. 선대 수령이자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임기 중 엄두도 못 내던 일이다. 하지만 수해 현장과 협동농장·양계장 같은 곳만 찾아다니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될 일이다. 김 위원장이 말한 대로 발은 땅에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각국의 지도자들이 국가 생존과 경제를 위해 백방으로 뛰고, 경쟁하며 협력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인들은 코로나19에 대처할 백신 개발과 인공지능(AI)·전기차·반도체·바이오 등 차세대 먹거리를 만들고 찾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어느 참모가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며 냉대했던 한국의 기업인들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잘 풀리는 듯하던 일이 꼬여버렸을 땐 어디서부터 생긴 문제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테이블로 복귀해 복기(復棋)해 보길 권한다. 망설이던 개혁과 개방의 길도 이젠 가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주민과 지식인들에게 인터넷을 허하고 핵·미사일 과학자와 생화학무기 개발자들을 AI와 바이오산업 등의 핵심 인재로 전환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전기차·반도체 공장을 꾸리고 김정은이 현지지도 해야 한다. 내년 1월 8차 노동당 대회에서 김 위원장이 제시할 비전은 코로나 이전의 시대와 달라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없이는 북한 체제의 생존은 어렵다. 그 어귀에는 비핵화란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쌀과 시멘트·철강…국무위원장 전략 물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수해를 입은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주민들에게 자신 명의의 예비양곡과 물자를 지원했다.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수해를 입은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주민들에게 자신 명의의 예비양곡과 물자를 지원했다. [노동신문=뉴스1]

지난달 초 큰 홍수 피해를 본 황북 은파군 대청리 피해복구 과정에 투입된 것과 같은 김정은 위원장의 통치성 물자를 일컫는다. 김 위원장은 당시 노동당 회의에서 “국무위원장 전략 예비분 물자를 해제해 (조속한 복구를) 보장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북한 관영 매체들은 전했다.
 
김정은이 자신 ‘몫’으로 지칭한 물자는 김일성 시대 ‘주석 폰드’라 불리던 것과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은의 조부인 김일성은 쌀이나 시멘트·철강·목재 등 물품과 설비를 일정 수준 비축해뒀다가 시혜성으로 노동당 부서나 지역·기관·기업소 등에 보내줘 문제를 최우선으로 해결할 수 있게 했다. 김일성의 직책이 ‘국가 주석’인 데서 따온 것으로 탈북 인사들은 전하고 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예비 물자 운용은 재난사태나 긴급상황 등에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절대 권력자의 내탕금처럼 쌀과 건설자재를 따로 챙겨놓았다가 시혜 차원으로 내놓는 모습은 봉건 왕정 시대에나 어울린다는 비판도 있다. 필요한 전략 비축 물자는 최고지도자의 명의가 아니라 국가 체제의 공공재 형태로 준비하고 운용되는 게 맞는다는 지적이다.
 
이영종 통일북한 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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