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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칼럼니스트의 눈] 그리스 파산, 과잉 복지보다 과잉 공무원 때문이었다

중앙일보 2020.09.15 00:23 종합 22면 지면보기

포퓰리즘을 쏘다 ⑦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포퓰리즘은 지역과 이념을 가리지 않는다. 포퓰리즘이 망친 나라, 남미에 베네수엘라가 있다면 유럽엔 그리스가 있다. 두 나라의 결은 좀 다르다. 베네수엘라가 ‘21세기 사회주의’식 전체주의 포퓰리즘을 했다면, 그리스의 포퓰리즘은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를 숙주 삼았다. 전체주의든 자유주의든 포퓰리즘은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한 번 사로잡은 나라는 기필코 재정을 거덜 내고 국민을 갈라놓으며 빈곤을 평준화한다. 이때 필요한 조건은 딱 하나. 끼리끼리 퍼주기를 국가적 과제로 포장할 줄 아는 탁월(?)한 포퓰리스트 지도자의 존재다. 베네수엘라엔 차베스가, 그리스엔 파판드레우가 있었다.
 

한번 늘어난 공무원 절대 안 줄어
EU에 빚내서 공무원 연금 지급
자식 세대 일자리 잃고 나라 떠나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줘라.”
 
198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 총리가 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취임 직후 각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30년 전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 “국민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십시오”라고 한데서 빌려온 이 말은 30년 후 그리스를 국가부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스는 파판드레우 총리 집권 직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재정이 가장 튼튼한 나라 중 하나였다. 1980년 국내총생산(GDP)대비 국가부채는 22.5%. 당시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전 집권당인 중도 우파 신민주주의당이 “정부 지출은 공공투자 부문에만 적자를 허용”하는 ‘재정의 황금률’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취임 직후 파판드레우는 이 황금률부터 폐기했다. 대신 재정을 쏟아부어 소득분배 정책을 펼쳤다. 선별 복지는 보편 복지로 바꿨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시작했고 출근 시간대 대중교통도 공짜였다. 65세 이상 무주택자엔 월세를 지원했다. 한 달에 최대 약 50만원(362유로)을 지원했는데 일부 지자체는 월세의 50%까지 세금으로 내줬다고 한다.
 
취임 1년만인 1982년 최저임금을 전년 대비 45.9% 인상했다.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도 제한했다. 그는 이런 포퓰리즘 정책을 밑천 삼아 총 11년간(1981~1989년, 1993~1996년) 장기 집권했다. 그의 집권 내내 그리스의 재정은 과잉 복지 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래 성장동력이니 구조개혁 같은 단어는 사라졌다. 70년대까지 단단했던 조선·석유화학·자동차 산업 등 제조업이 몰락의 길에 들어선 것도 이때다.
 
22.5%였던 국가 채무비율은 파판드레우 집권 3년 만에 33.6%로 50% 가까이 뛰었고, 1984년엔 40.1%, 1993년엔 100.3%로 치솟더니 2018년엔 184.8%로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에 올랐다. 파판드레우 집권 전 9.9%(1980년)였던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도 85년 15.4%, 2012년 26.9%로 수직 상승했다. 1970년대 평균 2.3%에 달하던 실업률은 파판드레우 정부가 집권한 80년대 평균 6.6%, 90년대 평균 9.7%로 확대됐고 2013년엔 27.5%까지 치솟았다.
 
파판드레우가 시작한 포퓰리즘은 정권 교체 후에도 이어졌다. 한 번 ‘퍼주기’의 맛을 본 국민이 금단 증상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포퓰리즘 처방’을 집권당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과잉 복지가 그리스 경제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스를 2010년 국가부도의 위기로 끌고 간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공무원이다.
 
파판드레우 집권 후 지출이 급증하긴 했지만,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직전 그리스가 사회복지에 쓴 돈은 GDP의 20.6%였다. 우리보다야 많지만, 당시 프랑스(34.9%)·영국(25.9%)은 물론 유럽연합 27개국 평균(26.9%)에 크게 못 미친다. 과잉 복지 때문에 그리스가 망했다는 주장은 일부 맞지만 100% 진실은 아니다. ‘과잉 공무원’에 눈길을 돌리면 진실이 보인다.
 
‘공무원 공화국’의 시작도 파판드레우였다. 그가 집권한 1981년 그리스 공무원은 약 30만명이었다(그리스는 통계가 부정확한 나라로 유명하다. 공무원 수는 2010년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처음 공식 집계됐는데, 당시 숫자는 76만8009명이었다). 취임 1년 만에 그는 공공부문 임금 지급액을 33.4% 늘렸다. 파판드레우가 ‘공무원 공화국’의 길을 연 이유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리스는 다당제 국가다. 사회당·신민주당·공산당·그리스정교회연합·급진좌파연합 등이 의석을 나눠 먹는다. 오랜 정치 혐오로 대선 투표율이 50%를 밑돈다. 선거 때마다 판세가 달라진다. 이런 구조에선 조직화한 투표권자를 잡는 쪽이 승자가 된다. 파판드레우는 공공부문 노조와 공무원에 주목했다. 효과는 대만족. 이후 그리스 정치권은 공공부문 노조와 공무원 표심 잡기에 매달리게 된다.
 
그 결과물이 세계 최고 수준인 그리스 공무원의 ‘황제 복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공무원들은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2시 30분에 퇴근했다. 워낙 지각 출근자가 많아 제시간에 출근하면 ‘정시 출근 수당’까지 줬다. 파판드레우 정권 말인 80년 후반 수도 아테네 남쪽, 차로 20분 거리의 글리파다 해변은 오후 3시만 되면 공무원들이 몰려 해가 질 때까지 고기를 굽고 와인을 마시는 장소로 유명했다. 약 80만 공무원에게 주는 월급이 GDP의 50%가 넘기도 했다. 노동인구 네 명 중 한 명이 공무원이다. 1년에 14개월분 월급을 받고 최소 한 달 유급 휴가를 즐긴다. 58세면 퇴직해 재직 때 월급의 95%만큼 연금을 평생 받는다. 이런 혜택은 일반 국민엔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스 기업연맹(SEV)에 따르면 민간부문 노동자는 공공 부문보다 약 38% 임금을 적게 받는다.
 
이렇게 나라를 운영하고도 멀쩡하다면 그게 비정상이다. 재정으로 공공부문과 공무원을 봉양하느라 젊은이들의 일자리는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2018년 그리스의 청년 실업률은 39.4%로 그리스 전체 실업률 19.3%의 두 배가 넘는다. 최악이던 2012년의 55.2%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EU에서 가장 높다.
 
그래도 체제 전복이나 치명적 사회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는 큰 이유는 그리스에 젊은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전 세계에서 중위 연령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인구의 반이 46세 이상이다. 학생보다 연금 수급자가 훨씬 많다. 그러다 보니 많은 그리스 젊은이들은 꿈을 잃고 나라를 떠나고 있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거의 50만명이 그리스를 등졌는데, 이는 인구의 약 5%에 달한다. 남아 있는 많은 청년은 부모의 집에서, 부모의 연금에 기대 함께 살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와 맞물려 서서히 인구통계학적 종말로 가고 있는 것이다. 파판드레우가 40년 전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다.
 
‘공무원 공화국’ 그리스는 국민과 지도자의 합작품
신길수 전 그리스 대사는 그리스가 한창 EU와 구제금융 협상 중이던 2012년 부임했다. 그는 “그리스 재정 파탄의 첫째 이유가 공무원 증원이었다”고 했다.
 
“그리스는 끼리끼리 문화가 강한 나라다. 인간관계와 체면을 굉장히 중시한다. 과거 한국 모습과 비슷하다. 지연·학연·혈연으로 인사 청탁을 하면 거절하지 못한다. 총리·장관에게 아는 모든 사람이 부탁한다. 그러면 정원이 100명인 자리를 200명까지 늘려서라도 청탁을 들어준다. 그러니 일도 안 하면서 돈을 받아가는 공무원이 급증한다. 장관이나 총리가 인사 청탁을 거절하면 체면만 구기는 게 아니라 다음번 자리 유지도 곤란해진다. 파판드레우는 그런 국민의 성정을 잘 이용해서 지지표를 모으는 데 공무원 증원을 무기로 활용했다. ‘공무원 공화국’ 그리스는 국민과 지도자의 합작품인 셈이다.”
 
신 전 대사는 “나라가 빚더미에 올랐지만, 공무원을 줄이기는커녕 EU에 차관을 받아서 월급을 줬다. 그러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EU와의 구제 금융 협상에서도 공무원 연금 삭감이 가장 난항이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만난 공무원들 모두 하나같이 ‘연금 삭감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며 “협상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버티니 협상이 잘 진척될 리가 없었다”고 돌아봤다.
 
결국 그리스는 201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총 2600억 유로를 지원받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 금융이었다. 신 전 대사는 “항만·공항까지 중국·독일에 팔고 결국 연금삭감까지 받아들여야 했다”며 “어떤 포퓰리즘 정부도 국민을 구제해주지 못하며, 방만한 빚잔치는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 국민이 비로소 깨달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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