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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백의 퍼스펙티브] 세계적 민주주의 위기, 한국도 예외 아니다

중앙일보 2020.09.14 00:19 종합 22면 지면보기

민주주의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나

지구촌의 스트롱맨들은 자유민주주의 법·제도를 합법적으로 타격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드로안 터키 총리,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AP·AFP·EPA·로이터=연합뉴스]

지구촌의 스트롱맨들은 자유민주주의 법·제도를 합법적으로 타격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드로안 터키 총리,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AP·AFP·EPA·로이터=연합뉴스]

폴란드 출신의 아담 쉐보르스키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는 『민주주의의 위기들』에서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유령이 전 세계에 떠돌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민주적 제도와 규범이 점진적으로 침식되고 반민주 세력은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 정권’이 법적 장치를 반민주적 목적으로 이용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진단도 내놨다. 민주주의 위기는 취약한 신흥 민주주의뿐 아니라 공고화된 선진 민주주의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 등 스트롱맨들, 선출 권력 이용해 민주주의 잠식
의회를 통법부로 만들고 선택적 법 집행하는 편법 일삼아
한국도 진보·보수 대립 격화하며 민주적 타협 공간 줄어
시민이 민주주의 후퇴시키려는 극우·극좌 세력 제어해야

현재 선진 민주주의에서 일어나는 위기 징후는 스텔스(stealth) 적 민주주의 침식과 퇴행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거침없이 진행돼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계급·젠더·인종·종족·종교 갈등이 격화하면서 선진 민주주의는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주의로 위기 징후를 드러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정치도 양극화돼 정당 간 극단적 갈등이 일상화됐다. 극우 정치 세력이 부상하고 자국민 우선주의(nativism)가 번성했다. 이민자·인종·여성 혐오가 만연했고 ‘스트롱맨 정치’가 출현했다. 이에 더해 페이스북·유튜브 같은 온라인 미디어 공간에서 1인 뉴미디어가 반체제적 극우 또는 극좌 포퓰리즘을 퍼뜨려 민주주의 제도와 문화 기반이 침식되고 있다.
  
비정상이 정상인 뉴노멀 민주주의
 
미국의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은 1787년 미국 헌법을 디자인하면서 포퓰리즘으로부터 대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권력 분립, 견제와 균형, 연방주의, 법의 지배, 권리장전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현재 미국 민주주의는 양극화와 포퓰리즘이 너무 심해 매디슨의 헌법적 보호 장치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없는, 비정상이 정상인 ‘뉴노멀’ 민주주의 시대로 들어섰다.
 
신흥 민주주의는 스트롱맨의 부활로 위기를 맞고 있다. 인도·터키·브라질은 두 차례 이상의 정권 교체로 민주주의 공고화 테스트를 통과했음에도 나렌드라 모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자이르 보우소나루 같은 스트롱맨들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걸 막지 못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같은 스트롱맨들도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다.
 
스트롱맨들은 사법부를 협박하고, 의회를 통법부로 만들며, 공공 미디어를 친정부 규제위원회 통제 아래 두고 있다. 또 관료들을 정권 이익에 복무시키고, 법을 선택적으로 집행하며, 선거 부정을 자행하고 있다. 스트롱맨들은 한꺼번에 민주주의를 전복시키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의 법·제도를 ‘합법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타격하는 스텔스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있다.
 
2016년에 브렉시트와 트럼피즘은 선진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지만,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광장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가 결합한 평화적이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2017년 한국인들은 박 대통령 파면 이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민주주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극복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를 전복시킬 가능성은 없어 보이며, 지난 4·15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176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을 확보한 뒤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침식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기독교 우파, 박근혜 추종 세력, 기득권 집단, 우파 유튜버들로 구성된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온·오프라인 광장을 점령해 정부 실적과 관계없이 무조건적 정권 퇴진 운동을 벌임으로써 정권 지지자와 반대파 간에 갈등의 정치가 격화돼 민주적 타협의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
 
둘째, 정당에 대한 신뢰가 하락해 정당의 대의 기능이 약화하고 있다. 그 결과 정당 정치의 공동화가 일어나고 있다. 셋째, 비선출직 ‘집정관 관료들’(guardians)의 능력주의 지배의 강화가 각종 국가규제위원회, 반독점 규제 기구, 금융감독기구, 검찰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문가 집정관 지배의 확대는 전문가 집정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약화하고 대의기구의 관할 영역을 침식하고 있다.
  
민주주의 침식 막는 제도적 혁신 절실
 
현재 일어나는 민주주의 위기는 군사 쿠데타나 민중 봉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폭력적으로 붕괴하는 전통적 위기가 아니다. 선출된 정부에 의해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침식되고, 스텔스처럼 전복되는 위기라는 점에서 전례 없는 위기다.
 
한국 민주주의는 이러한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먼저, 시민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통해 시민들이 민주화 세력을 지원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는 세력을 제어해야 한다. 둘째, 전문가 가디언 집단에 의한 개혁 사보타주를 막기 위해 정당과 의회를 비롯한 대의기구에 의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셋째, 민주주의 침식과 전복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을 통하여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강한 면역력을 가진 난공불락의 민주주의로 재창조해야 한다.
 
양극화 해소 여부가 한국 민주주의 운명 가른다
위기(crisis)는 고대 그리스어로 krisis이다. krisis는 현상 유지가 불가능하게 됐으나 현재 상황을 대체할 대안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전환점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적 틀 내에서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주먹·총알·돌 같은 폭력이 투표지라는 ‘종이 돌’(paper stones)을 대체할 때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위기 때 행위자들은 폭력적 대결로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거나, 상호 협력으로 불확실성이 제도화된 민주적 경쟁에 자신의 미래를 맡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탈리아 민주주의는 파시스트 운동에 붕괴됐다. 독일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집권한 나치 정당에 의해 강제로 무너졌다. 스페인 민주주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주도한 내전에 의해 붕괴됐다. 또 1958~75년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전격적인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반면 74년 이후 제3의 민주화 물결로 태어난 민주주의들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급작스럽게 붕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점진적이고 스텔스적인 침식·후퇴·전복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신흥 민주주의는 물론 선진 민주주의에서도 스텔스적인 민주주의 침식과 퇴행이 일어나며『역사의 종언』을 예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승리주의(triumphalism)는 힘을 잃고, 선진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도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하고 갈등을 평화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실망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전복하려는 세력의 선동에 동참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선제적 제도 혁신과 민주주의 갈등 해결 능력을 높임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강한 난공불락의 민주주의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광주과기원(GIST) 석좌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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