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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소통카페] 할 말, 못할 말을 가리는 게 그리 어려운가

중앙일보 2020.09.14 00:13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말(스피치)이 귀족계급의 독점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재산과 권리를 지키는 수단이 된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 도시국가(polis)가 발전하던 시기다. 말이 힘이고 권력이며, 이해관계인 것을 보통 사람들도 알게 된 것이다.
 

상식 어긋난 국민 무시 궤변
할 말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
잘못 인정않는 무소신도 문제

기폭제는 시칠리아 시라쿠스의 독재자 트라스 발루스의 폭정이 끝나며, 시민들이 잃어버린 정치경제적 권리를 찾기 위해 법정에서 소송을 벌일 수 있게 되면서다. 말이 권리를 확보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일반 시민 중에서 제비뽑기로 지명된 201명 이상의 배심원단으로부터 유리한 판정을 얻기 위해서는 주장·논박·변론의 논쟁능력이 필요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말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수사학(Rhetoric)이라는 학문도 등장했다.
 
‘좋은 말’을 하는 능력과 가치는 서양사회를 떠받치는 전통으로 기능했다. 좋은 말이 공동체의 의식과 품격을 높이고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한다는 믿음에서다. 서양사의 굽이굽이에는 위대한 스피치(great speech)로 평가되는 말이 있다. 그리스시대 이래 좋은 말이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고, 구성 요소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현대에서도 좋은 말들을 찾아내고, 대부분의 대학에서 전공에 관계없이 필수 교양과목으로 다룬다.
 
로마시대 키케로는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주제, 아이디어, 내용을 선택하는 ‘발견’(invention), ▶내용과 이야기의 순서를 정하는 ‘배치’, ▶멋지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스타일’, ▶내용을 마음에 새기는 ‘기억’,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표출’을 좋은 말을 하기 위한 5가지 핵심 요소로 정리했다. 이들 요소는 현대에서도 가장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말의 설득력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알려진 이성에 어필하는 ‘로고스’, 감정에 호소하는 ‘파토스’, 말의 신뢰성과 윤리성을 대변하는 ‘에토스’는 발견에 속하는 요인이다. 내용에 대한 생각의 넓이와 깊이, 분별력, 설득방법의 선택도 발견에 속한다.
 
소통카페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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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을 만드는 요소와 요인들은 그리스·로마·중세·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시류와 권력의 성격에 따라 각광을 더 받기도 하고 덜 받기도 하는 부침을 겪는다. 그러나 에토스는 시대를 관통하며 변함없이 강조되어 왔다. 에토스가 부재하면 아무리 그럴싸하게 말을 꾸며도 공정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억지가 되기 때문이다.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말’(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하는 좋은 연설’(로마의 퀸틸리안), ‘과시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자기 현시가 아니고 예술의 기능을 하는 것’(중세의 오거스틴), ‘인간의 건전한 행동을 이끄는 진실과 선함을 전달하는 것’(르네상스 시대의 베이컨)이 에토스다(『Public speaking as liberal arts』, Wilson & Arnold). 신뢰하지 못할 말은 좋은 말이 아니라는 윤리성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쩔쩔매고 있는 국민을 위한 긴급 재난 지원금의 지급 대상을 놓고 설왕설래 끝에 선별지급으로 결정되었다. 그 와중에 여당 대표의 선별지원 고려에 대해 제1 야당안과 일치하는 목소리라서 (문제가 있다는) 여당 의원의 비판은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다. 국민이 아니라, 상대 당과 반대로 가는 것이 정책 결정의 우선이라는 건 궤변이다.
 
국회의원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망치와 육탄전을 동원하는 동물국회, 의석수로 밀어붙이는 일방통행과 무조건 반대로 일하지 못하는 식물국회만 문제가 아니다.
 
국민을 무시하는 궤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직무유기, (김해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지적처럼) 잘못을 잘못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무소신도 큰 문제다. 특히 힘 있는 여당의 말은 내 편과 네 편,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이분법에 찌든 닫힌 사고의 닫힌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국민의 생각과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열린 사고의 열린 말로 대한민국 공동체의 유대감을 높이는 말이어야 한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상식을 왜 모르는지 답답하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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