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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F.M.

중앙일보 2020.09.14 00:11 종합 33면 지면보기
강기헌 산업1팀 기자

강기헌 산업1팀 기자

2007년 10월 평양 4·25 문화회관 광장. 김장수 국방부장관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면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사진이 공개되자 김 장관에겐 ‘꼿꼿장수’란 별명이 붙었다. 바로 옆에서 허리를 숙여 악수한 김만복 국정원장의 사진과 비교되면서 그에게 박수를 보낸 국민이 많았다.
 
꼿꼿장수는 매뉴얼이 만들었다. 한국군 야전교범 ‘경례 및 예절’ 규정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흔들어 아첨하거나 비굴해 보이는 듯한 저자세 악수 방법을 삼가야 한다. 손은 약간 힘을 주고 가볍게 잡고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보며 자연스럽게 교환해야 하며 손을 너무 흔들거나 두 손을 쥐는 것은 실례가 된다.” 김 장관은 야전교범을 그대로 따랐다.
 
한국군 야전교범은 미군의 필드 매뉴얼(Field Manual)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해 만든 게 많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벤치마킹이다. 군에서 자주 쓰였던 “F.M. 대로”라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미군이 운영하는 F.M. 중에는 300페이지 분량의 소설책보다 두꺼운 것도 꽤 많다. 곳곳에 구체적인 삽화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 최강 미군의 힘이 강력한 무기체계가 아닌 깨알 같은 F.M.에서 나온다는 얘기도 있다.
 
야전교범(F.M.)이 세세한 규정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사고가 발생해도 야전교범에 따랐다면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판단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실수를 차단하는 것도 야전교범의 역할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판단에 개입하는 것도 막는다. 혼자 살겠다며 전우를 버리는 행위는 전시든 평시든 용납할 수 없다. 다양한 야전 경험을 바탕에 깔고 있는 탓에 야전교범은 군의 정석(定石)이라 불린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아들의 휴가 미복귀 의혹에 “소설 쓰시네”라고 말했다가 최근에는 입을 닫았다. 황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산에서 놀던 철부지의 불장난으로 온 산을 태워 먹었다”며 “최초 트리거(방아쇠)인 당직 사병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현직 장관과 국회의원이 "매뉴얼대로 했다”는 말 한마디를 못한 채 차례로 예비역 병장을 비난하고 나섰다. “매뉴얼에 따랐다”는 장병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조차도 나무랄 수 없다. 매뉴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강기헌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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