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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은 ‘양심 호루라기’라던 여권, 집권 뒤 범죄자 취급

중앙일보 2020.09.14 00:02 종합 4면 지면보기
정의연 회계 부정 의혹을 제기한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 5월 기자회견 장면(왼쪽). 2018년 12월 ’청와대가 KT&G 사장을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밝힌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가운데).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을 폭로한 김태우 전 검찰수사관의 지난해 1월 법원 출석 모습.(오른쪽) [연합뉴스, 유튜브]

정의연 회계 부정 의혹을 제기한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 5월 기자회견 장면(왼쪽). 2018년 12월 ’청와대가 KT&G 사장을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밝힌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가운데).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을 폭로한 김태우 전 검찰수사관의 지난해 1월 법원 출석 모습.(오른쪽) [연합뉴스, 유튜브]

한때 “민주당 정신의 근간”이란 자평이 나왔을 정도로 ‘내부고발자 보호’는 더불어민주당에선 꽤 유서 깊은 화두다. 1992년 이지문 중위(현 한국청렴운동본부 이사장)가 군 부재자 부정선거 의혹을 폭로했을 때 김대중(DJ) 당시 민주당 공동대표는 진상규명과 국방장관 해임을 요구하며 목청을 높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참여연대 시절 내부고발자 보호 입법운동을 벌여 2001년엔 부패방지법이 제정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5년 반부패기관협의회에서 “내부고발은 결코 배반이거나 부도덕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현장에서]
최순실 의혹 폭로 고영태엔 “의인”
문정부 의혹 제보 신재민에 “망둥이”
당직병 발언 놓고는 “단독범” 운운
“자신들에 유리할 때만 제보자 편”

민주당의 목소리는 보수정권하에서 더 커졌다. 2012년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주무관이 이명박 정부의 불법사찰 의혹을 폭로하자 백혜련 의원은 “장 주무관에 대한 법적 조치는 진실을 알리려는 모든 이들에 대한 압박이자 민주주의를 저버린 행동”이라고 옹호했다. 2016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 당시 민주당은 ‘제보자 흑기사’를 자청했고, 최순실씨에 대한 각종 의혹을 폭로한 고영태씨 등을 ‘의인’으로 치켜세웠다. 이듬해 ‘사법농단’ 의혹을 폭로한 이탄희 판사는 훗날 민주당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2017년 4월 민주당이 내놓은 ‘나라를 나라답게’란 제목의 문재인 대선후보 100대 공약에도 내부고발자 보호는 꽤 중요하게 다뤄졌다. 총 195쪽 분량의 공약집은 목차 등을 제외하면 15쪽부터 시작되는데, 앞부분인 18쪽에 명시된 것이 바로 ‘내부고발자 등 공익신고자에 대한 보호 강화’였다. 공교롭게도 이 공약집의 발행인은 추미애 당시 민주당 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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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5월 대선에서 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인수위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공익신고자 보호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자문위 대변인이던 박광온 의원은 “내부고발자들은 양심의 호루라기를 분 사람이지만 따돌림, 보복을 당해 가정 파탄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했고, 자문위 분과 위원장 박범계 의원은 “공익제보자들이 더는 눈물 흘리지 않게 하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내부고발자를 대하는 여당과 그 주변 인사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2018년 말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청와대가 기재부에 적자 국채 발행을 압박했다”고 폭로하자 민주당에선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홍익표 당시 수석대변인)는 공격이 터져나왔다. ‘윤미향 사태’ 때 회계 부정 의혹 등을 폭로한 이용수 할머니를 향해서도 방송인 김어준씨는 ‘배후설’을 제기했고, 일부 지지자들은 이 할머니를 “토착왜구”로 몰았다.
 
급기야 황희 의원은 12일 추미애 장관 아들 관련 의혹을 제기한 당직 사병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단독범” “철부지의 불장난으로 온 산을 태워먹었다”는 표현을 썼다.
 
과거 ‘제보자 보호’에 올인하는 듯 행동했던 이들의 파격 변신에 야당 법사위원들은 “정권에 유리하면 보호 대상이고, 불리하면 인격 살인을 해도 된다는 것인가”라며 공익제보자 보호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추 장관은 2017년 당 대표 시절 “내부고발자는 큰 결심과 용기를 필요로 하고, 고발 이후에도 배신자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가는 게 현실”이라며 “내부고발자를 적극 보호하는 제도 장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에 많은 국민이 어리둥절할 것 같다.
 
손국희·하준호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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