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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曰] 아버지들이 쓰러진다

중앙선데이 2020.09.12 00:28 703호 30면 지면보기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내가 염경엽(52) 감독을 처음 만난 건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으로 일하던 2012년 10월이었다.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의 신임 감독으로 편집국에 인사를 하러 왔는데, 보험회사 영업사원이나 대기업 홍보실 직원을 보는 것 같았다. 말쑥한 수트에 금테 안경을 쓴 그는 매너도 깔끔한 데다 달변이었다.
 

염경엽 감독, 스트레스로 경기 중 실신
책임감 무게만큼 건강 스스로 지켜야

염경엽 감독은 부임 첫 시즌인 2013년 넥센을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려놓은 것을 포함해 2016년까지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치밀한 작전과 선수 기용으로 ‘염갈량(염경엽+제갈량)’ 별명도 얻었다. 2017년 SK 와이번스로 옮겨 단장을 맡았고, 지난해 감독이 됐다.
 
그런 염 감독이 쓰러졌다. 6월 25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더블헤더 1차전, 2회 초 두산 공격 때 덕아웃에 서 있던 염 감독은 왼쪽으로 스르르 넘어졌다. TV 중계로 이 장면이 생생하게 잡혀 더욱 큰 충격이었다. 인천 길병원으로 이송된 염 감독은 다행히 의식을 회복했다. 담당 의사는 “불충분한 식사와 수면, 과도한 스트레스로 심신이 불안정한 상황”이라고 했다.
 
올 시즌 SK는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다. 12일 현재 10개 구단 중 9위다. 염 감독이 쓰러질 당시 SK는 7연패에 빠져 있었다. 구단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 따르면 예민한 성격인 염 감독은 하루 두 시간 이상 자지 못했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탄산음료만 마셨다고 한다. 염 감독은 9월 첫 주에 팀으로 돌아왔지만 5일 만에 박경완 수석코치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다.
 
프로야구 지도자가 쓰러진 건 이제 큰 뉴스가 아닐 정도가 됐다. 2001년 김명성(롯데) 감독이 시즌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97년 백인천(삼성) 감독은 뇌출혈로 입이 돌아가는 등 고생한 끝에 사임했다. 김인식(한화) 김경문(NC) 감독도 소속팀을 맡고 있던 시절 뇌질환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축구에서도 전도 유망한 감독들이 일찍 세상을 뜬 경우가 많다. 99년 여름, 강릉에서 경기를 마치고 부산 대우 신윤기 감독(당시 42세)을 만났더니 입술이 심하게 부르터 있었다.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겠지만 마음 편하게 먹고 건강관리 잘 하라”고 했는데 9월 12일에 부음을 접했다. 한·일전에 유난히 강해 ‘축구계 이순신’으로 불리던 이광종 전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도 간암 투병 끝에 52세의 아까운 나이로 우리와 헤어졌다. 조진호 감독(부산 아이파크·당시 44세)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극심한 압박감과 스트레스로 쓰러지고 숨진 감독들의 공통점이 있다. 가장(家長)이자 아버지라는 점이다. 팀을 책임짐과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염 감독은 쓰러지기 전날 고참 선수 11명을 불러 소고기를 구워 주며 “포기하지 말자”고 다독였다고 한다. 자신은 음료수 밖에 못 마시면서 선수들에게 소고기를 사 주는 게 감독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이다.
 
며칠 전 회사 동료들와 ‘남자들의 돈 씀씀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줄 모른다. 가족의 생계를 먼저 생각하는 책임감 때문이 아닐까”하는 말이 나왔다. 건강을 위해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는 것도 망설일 뿐 아니라, 간다고 해도 별도 비용을 내야 하는 PT(강사가 지도하는 개인 트레이닝)는 꺼린다는 거다.
 
코로나19로 온 국민의 스트레스 지수가 극도로 높아졌다. 자영업자들의 속은 타들어간다. 이럴 때일수록 아버지들이 건강해야 한다. 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홈 트레이닝을 이용하거나, 동네 공원이라도 산책하면 좋겠다. 아침마다 가던 수영장에 갈 수 없는 나는 자전거를 샀다. 한강 자전거길이라도 달려볼 참이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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