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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밍밍한 미국 라거맥주가 수제맥주 우등생 된 까닭

중앙일보 2020.09.10 15:00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51)

‘미국 맥주’라고 하면 버드와이저, 밀러라이트 같은 맥주가 떠오른다. 밝은 황금빛에 하얀 거품, 숨 가쁘게 올라오는 탄산 등 우리가 광고에서 보는 맥주의 전형이다. 깊은 풍미보다는 시원함과 탄산감이 도드라지는 이들 맥주는 미국식 부가물(adjunct) 라거 맥주다. 맥주 재료로 사용되면 보리보다 가벼운 맛을 내는 옥수수, 전분, 쌀 등 부가물을 섞어서 만든 ‘밍밍한’ 맥주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미국식 부가물 맥주는 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됐다. 보리보다 가격이 싼 옥수수 등을 넣으면서 생산 단가를 낮춰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기에 적합했다. 여기에 대기업들의 마케팅 공세는 소비자들에게 맥주는 모두 그런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이를 통해 소규모 맥주 양조장들은 도저히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는 견고한 벽이 만들어졌다. 미국뿐 아니라 각국에서 맥주 시장 점유율 1위는 대부분 부가물이 들어간 라거가 차지하게 됐다.
 
풍미를 최소화한 이런 맥주들이 오랜 시간 시장을 장악하자 미국 소비자들로부터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럽 여행 등을 통해 경험한 다양한 맥주가 이들의 입맛을 흔들어 놨다. 또 모든 산업에서 대기업들이 독과점 체제를 구축한 것에 대한 거부감도 커졌다.
 
이런 요구들로 인해 미국 정부는 1978년 비로소 집에서 맥주를 만드는 홈브루잉을 합법화했다. 스티브 잡스만 차고에서 창업한 게 아니라 홈브루어들도 차고에서 양조장을 차렸다. 수제맥주 양조장 창업의 90%는 열정으로 가득한 홈브루어들로부터 이뤄졌다.
 
작은 양조장들로부터 창의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캐스케이드 홉을 시작으로 미국 고유의 홉들이 널리 쓰이게 되면서 미국식 맥주가 새로운 개성을 갖게 됐다. 유럽의 맥주 스타일을 계승하면서도 미국 홉의 특성(감귤류, 열대과일, 송진 등)이 더해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고유의 매력으로 무장하게 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만 차고에서 창업한 게 아니라 홈브루어들도 차고에서 양조장을 차렸다. 수제맥주 양조장 창업의 90%는 열정으로 가득한 홈브루어들로부터 이뤄졌다. [사진 flickr]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맥주 전통이 없다는 게 미국 맥주가 더 큰 다양성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유럽의 맥주 강호들은 저마다 몇백 년 이상의 맥주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경우 맥주 재료를 보리, 홉, 효모, 물로 제한하는 맥주 순수령 때문에 새로운 맥주가 탄생할 여지가 없었다. 영국과 벨기에는 수 세기 동안 지역마다 여러 맥주가 양조되고 있지만 그 전통에 파묻혀 있었다.
 
미국은 그런 전통의 토대가 없어 새로운 혁명이 일어나기에 적합했다. 유럽의 맥주 스타일을 미국식으로 재해석했다. 이제는 다시 유럽의 양조장들이 미국식 맥주를 만들고 있다.
 
현재 미국 전역에 운영되고 있는 수제맥주 양조장은 8000개가 넘는다. 서부, 중부, 동부가 각기 다른 스타일의 수제맥주를 만들어낸다. 같은 미국식 인디아페일에일(IPA)이라고 할지라도 서부해안식은 미국 홉 특성이 더 강조되고 동부에는 영국 스타일의 그림자가 남아있다. 북동부에서는 과일주스 같은 뉴잉글랜드IPA가 탄생했다.
 
미국 스타일 수제 맥주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미국식 맥주의 주춧돌인 미국 홉 수출도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국내의 수제맥주 양조장들도 대부분 미국 수제맥주 스타일을 지향한다. 또 우리나라는 미국 수제맥주 산업에서 2번째로 큰 수출 시장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성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수제맥주 시장이 용틀임을 시작하고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체 맥주 출고량은 매년 줄고 있지만 수제맥주는 성장 중이다. [사진 pixabay]

우리나라에서도 다양성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수제맥주 시장이 용틀임을 시작하고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체 맥주 출고량은 매년 줄고 있지만 수제맥주는 성장 중이다. [사진 pixabay]

 
미국의 전체 맥주시장 규모는 줄어들고 있지만 수제맥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맥주 소비량은 3.7%가 감소해 4년 연속 하락세를 보인 반면 수제맥주 소비량은 4.1%가 늘었다. 미국 대기업 맥주 회사들의 고용이 줄어들고 있지만 수제맥주 회사들의 고용은 계속 증가추세다. 대기업에 비해서 생산량 당 고용효과가 2배 이상 높다.
 
시간이 갈수록 기술이 집약되고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큰 기업들이 경제를 선도하는 데 반해 맥주 업계만은 더 분화되고, 더 많은 사람이 더 적은 양의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성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수제맥주 시장이 용틀임을 시작하고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체 맥주 출고량은 매년 줄고 있지만 수제맥주는 성장 중이다. 미국 수제맥주 산업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수제맥주 붐은 다양성 증대를 통해 소비자 만족도를 높일 수 있고 고용을 자극한다.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것만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수제맥주를 양조하는 중소기업들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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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혜 황지혜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필진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면서 맥주는 짝으로 쌓아놓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고 있는 맥주 덕후. 다양한 맥주를 많이 마시겠다는 사심으로 맥주 콘텐츠 기업 비플랫(Beplat)을 운영하고 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맥주 스타일, 한국의 수제맥주, 맥주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 등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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