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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텔레그램판 디지털교도소 "악마 잡으려 악마 됐다" 잠적

중앙일보 2020.09.10 11:16

‘n번방’ 등 성 범죄자 신상공개하는 대화방

온라인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공유하는 이들을 적발해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텔레그램 대화방 '주홍글씨'의 소개글. [사진 텔레그램 캡쳐]

온라인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공유하는 이들을 적발해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텔레그램 대화방 '주홍글씨'의 소개글. [사진 텔레그램 캡쳐]

성범죄자 등의 신상정보를 임의로 공개하는 온라인 단체대화방 ‘주홍글씨’ 운영자가 돌연 잠적했다. 비슷한 성격의 인터넷 사이트인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에 대한 인터폴 공조수사 요청이 이뤄지는 등 경찰 수사가 본격화된 시점에서다.
 

운영자 ‘중국전문’ 10일 돌연 “그만두겠다” 입장 밝혀
비판여론 높아지고 경찰 수사 본격화에 부담 느낀듯

 아이디 ‘중국전문’을 사용하는 주홍글씨 운영자는 10일 오전 주홍글씨 대화방에 운영을 그만두겠다는 입장을 올렸다. 그는 “이번 인터폴 수배 요청을 보고 그만둘 때가 됐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검거되더라도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감시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중국전문’은 이어 “지금껏 강력 범죄자들 추적하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저의 마지막 메시지를 남깁니다”라며 “저는 실패했지만 남은 자경단들이 올바른 성 문화를 위해서 힘쓸 겁니다. 절 욕해도 좋습니다. 악마를 잡기 위해 악마가 됐던 것뿐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협조해주신 경찰, 기자, 자경단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 중국전문은 갑니다”라고 덧붙였다.
 
 ‘중국전문’은 자신의 입장을 녹음한 음성 파일을 올리면서 중국 정치인인 장제스(蔣介石·1887~1975) 전 중화민국 총통의 사진과 영화 ‘라스트 홍콩 97’의 테마곡 ‘아이 러브 베이징 텐안먼(I love beijing tiananmen)’ 음원을 첨부했다. 이어 주홍글씨 운영을 이어받은 운영자가 “2기 주홍글씨가 잘 이어가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텔레그램 대화방 '주홍글씨' 운영자 '중국전문'이 10일 오전 "그만두겠다"는 입장을 음성 메시지 형식으로 올린 모습. [사진 텔레그램 캡쳐]

텔레그램 대화방 '주홍글씨' 운영자 '중국전문'이 10일 오전 "그만두겠다"는 입장을 음성 메시지 형식으로 올린 모습. [사진 텔레그램 캡쳐]

 텔레그램 메신저에 개설된 ‘주홍글씨’는 이른바 ‘n번방’ 사건이 불거진 후 성 착취 음란물을 제작·구매·관람하는 남성들을 찾아내 이름과 나이, 휴대전화 번호, 직업 등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찰 수사를 돕는다는 이유로 ‘자경단’을 자처한다.
 
 n번방에서 활발히 활동한 ‘박사’ 조주빈(24)과 그의 공범 ‘부따’ 강훈(18), 육군 일병 ‘이기야’ 이원호(19), n번방을 처음 만든 ‘갓갓’ 문형욱(24) 등도 경찰의 신상공개 결정이 내려지기 전 주홍글씨에서 먼저 신상정보가 공개됐었다. 주홍글씨는 텔레그램에서 음란물을 찾는 사람에게 접근해 음란물을 제공한 뒤 신상정보를 캐내는 방법을 주로 쓴다. 주홍글씨는 지난 4일에도 지인의 사진을 성 착취물에 합성시키는 이른바 ‘지인능욕’을 시도한 남성의 실명과 휴대전화 번호 등 신상정보를 올렸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된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고 채정호(59) 카톨릭대 의대(정신의학과) 교수를 엉뚱하게 성착취물 구매자로 사이트에 허위 게시한 사건이 터져 비판 여론에 직면했다. 주홍글씨와 디지털 교도소는 최근 대화방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생과 관련한 해명을 조목조목 올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행방을 감췄다.
 
'n번방' 사건의 주범인 '박사' 조주빈(왼쪽)과 공범 '부따' 강훈. [뉴스1]

'n번방' 사건의 주범인 '박사' 조주빈(왼쪽)과 공범 '부따' 강훈. [뉴스1]

 경찰은 주홍글씨를 비롯해 자경단 활동을 하는 텔레그램 채팅방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 9일부터 부산경찰청이 주홍글씨 대화방 운영자와 개인정보 게시자들에 대한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를 수사 중이다.  
 
 디지털 교도소에 대한 수사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월부터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를 수사 중인 대구경찰청은 최근 인터폴을 통한 국제 공조 요청에 나섰다.
 
 이와 관련해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8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 출석해 디지털 교도소에 대해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디지털 교도소는 사적 처벌을 하는 것이고 내용 자체가 명예훼손”이라고 지적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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