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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노인 강우규는 청년 안중근의 계승자였을까

중앙일보 2020.09.10 00:17 종합 20면 지면보기

100년 전 노인동맹단의 민족운동 

서울역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 의거 92주년을 맞은 2011년 세워졌다. 대한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담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역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 의거 92주년을 맞은 2011년 세워졌다. 대한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담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동양의 고전 하면 역시 『논어』다. 어느 날 공자는 냇가에서 이런 말을 했다. “흘러가는 게 이와 같도다!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유명한 천상지탄(川上之歎)이다. 이 짧은 구절에서 공자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까.
 

3·1정신 이어간 한국 노인의 각성
조선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 투척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거듭 역설
일제의 한국 병합 허구성 꾸짖어

맹자는 학문의 정진으로 읽었다. 샘물이 쉬지 않고 흘러 흘러 바다에 이르고야 만다는 것. 황간은 『논어의소』에서 다르게 해석했다. 냇물이 흘러가듯 인생도 흘러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구나. 형병의 『논어주소』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냇물이 흘러가듯 시국도 흘러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구나. 공자는 시간의 불가역성 앞에서 인생과 시국을 비관한 것일까.
 
주희의 『논어집주』는 냇물에서 도(道)를 발견했다. 자연은 어찌 이다지도 성실한가. 해 지면 달 뜨고 겨울 가면 여름 오고, 중단 없이 영속하는 자연의 순환은 도의 운행이다. 주희는 공자의 냇물에 시간이 아니라 도를 입혔다. 공자는 비관론자에서 낙관론자로 다른 사람이 됐다.
 
냇물에서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1988년 중국 CCTV 다큐멘터리 ‘허샹’(河殤·황하의 죽음)은 황하에서 중국의 역사를 성찰한다. 허(河)란 무엇인가. 고대 농경문명을 상징한다. 샹(殤)이란 무엇인가. 성년이 되지 않아 요절함을 뜻한다. 허샹이란 노쇠한 중국 문명의 유아적 죽음이다. 허샹은 말한다. 이제 생명의 물은 바다에서 온다. 남색 바다로 진입하자. 현대 문명을 만들자.
  
20세기 ‘소년 한반도’에 대한 큰 기대
 
대한제국 시절 한국인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한 잡지 ‘소년 한반도’. [중앙포토]

대한제국 시절 한국인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한 잡지 ‘소년 한반도’. [중앙포토]

이것은 급진적인 주장이다. 중국 역사는 황하에 갇혀 있는 노쇠함의 역사, 동시에 아직 바다에 나가지도 못한 미성년의 역사라는 뜻이다. 중국은 늙은 아이와 같은 존재라는 것, 허샹은 그 역설의 표현이었다. 중국 근대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도 ‘소년 중국’을 논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중국은 역사는 장구하지만 실제로 문명의 나이는 몇 살인가. 요순 이전은 태아 시대, 은나라·주나라는 젖먹이 시대, 공자부터 지금까지는 어린이 시대. ‘늙은 아이’와 동일한 논법이다. 그는 말했다. 과거 역사에 매몰된 노인에게는 미래가 없으니 미래 문명의 희망을 소년에 두자.
 
대한제국 시절 한국인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한 잡지 ‘소년’ 창간호. [중앙포토]

대한제국 시절 한국인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한 잡지 ‘소년’ 창간호. [중앙포토]

량치차오의 ‘소년 중국’은 파급력이 컸다. 한국 사회에 ‘소년 한반도’라는 월간지가 발간됐다. 창간호(1906.11)에 이런 말이 있다. ‘이날이 무슨 날인가. 우리 역사에서 구사회를 혁명하는 날이오, 곧 20세기 소년 한반도가 탄생하는 날이다.’ 황하의 죽음만큼이나 급진적인 주장이다. 구세대를 글자 그대로 혁명하겠다고 선언했다. 혁명의 노래는 ‘소년’ 창간호(1908.11)에서 발견된다. 최남선의 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 때린다, 부순다, 무너뜨린다.’ 바다로부터 육지를 강타하는 혁명의 노도다.
 
이윽고 굉음이 폭발했다. 바다의 소년인가? 아니, 바다의 노인이었다. 1919년 9월 2일 동해 바다 건너온 노인이 지금의 서울역에서 신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사이토가 탄 마차에서 일곱 걸음 앞에 떨어져 37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이토에게는 일부 파편이 미치는 데 그쳤으나 서울을 진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노인의 이름은 강우규(姜宇奎). 65세의 그는 노인동맹단 소속이었다.
 
노인동맹단은 어떤 단체였을까.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처하기 위한 한인 임시정부의 필요성이 절실해지자 러시아 한인은 총회를 열고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했다. 대한국민의회는 니콜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을 축하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1919.3.17) 이어서 김치보를 단장으로 노인동맹단이 결성됐는데, 숫자 7을 좋아해 발기인도 7인, 입회금도 7루블, 연령 제한도 70세, 회원 총수 목표도 7000명이었다.
 
한· 중·일 3국의 공존을 일찍이 설파한 안중근 의사. 1909년 이토 히토부미 저격 사건도 동양평화론에 뿌리를 두었다. [중앙포토]

한· 중·일 3국의 공존을 일찍이 설파한 안중근 의사. 1909년 이토 히토부미 저격 사건도 동양평화론에 뿌리를 두었다. [중앙포토]

노인동맹단의 노인은 특별한 노인이었다. 3·1운동으로 자각된 노인이었다. 3·1운동의 주역이 청년이고 여기에 여성과 어린이까지 독립만세를 외쳐 민족정신을 발출하고 있는데, 노인계가 수수방관해서야 되겠느냐는 박은식의 취지서가 이를 말한다. 노인회를 만들어 음주가무로 태평세월 지내는 방탕한 노인, 소년 사회의 신교육 운동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완고한 노인, 지난날 황성신문에서 비판한 이런 노인과는 다른 노인이었다. 현재 확인되는 2005명 회원 명단 중에는 ‘이(李)마리아’ ‘박(朴)이리나’ ‘차(車)부인’ ‘김(金)부인’ 등등, 여성도 적지 않다.
 
노인동맹단은 5월 5일 대표 7인을 국내에 파견했다. 7인에는 이동휘의 아버지 이승교, 안중근의 숙부 안태순도 있었고 윤소사·차부인 등 여성 2인도 포함됐다. 이들은 5월 31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6월 25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보냈는데, 일본의 한국 병합이 불가한 7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진정한 동양평화를 설득했다. 곧 한국이 독립하면 동양 평화가 위태롭다는 일본의 생각이 잘못이고 도리어 한국이 독립해 일본과 우호국이 됨으로써 동양 평화가 달성되는 것이니 한국 인민의 독립 혈쟁(血爭)이야말로 배일(排日)이 아니라 친일(親日)이라는 논리다.
  
‘이마리아’ ‘차부인’ 등 여성도 적잖아
 
일제강점기 강우규 의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 카드. [중앙포토]

일제강점기 강우규 의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 카드. [중앙포토]

일본은 3·1운동을 탄압한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소환했다. 한국 독립 요구를 수용한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후임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를 파견했다. 이는 3·1운동이 일본의 한국 병합이 아니라 조선 총독 하세가와의 실정 때문에 일어났다고 호도하는 행위였다. 노인동맹단 대표 강우규의 폭탄 투척은 그래서 일어났다.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지적한 대로 이 사건이 없었다면 한국인은 일본의 신임 조선 총독을 환영하고 조선 총독의 새 정치를 확신한다고 선전됐을 것이다.
 
9월 2일 거사를 감행한 강우규는 9월 17일 누하동 은신처에서 한인 순사 김태석에게 체포됐다. 김태석은 고문 왕이라 불린 친일 경찰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강우규는 체포된 뒤에도 투쟁을 계속했다. 경찰 취조에서도 장시간 독립 연설을 했고, 사형 판결을 받은 법정에서도 동양 평화를 역설했다.
 
한국의 ‘의협’ 전통을 중시한 박은식은 장인환·전명훈·안중근·이재명·김정익·안명근과 함께 강우규를 7열사라고 불렀다. 공교롭게 7이다. 7열사 중에서 안중근과 강우규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 통감 또는 조선 총독을 대상으로 하는 의열 투쟁이었다는 것. 동양 평화를 역설했다는 것. 65세 노인 강우규는 31세 청년 안중근의 계승자였을까.
 
강우규 의사의 의열 투쟁이 일어난 9월이다. 101년이 지난 지금 동양 평화와 한일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공자의 냇물도 다시금 떠올려 본다. 어쩌면 공자는 냇물의 흐름에서 평화를 위한 부단한 투쟁의 역사를 보았을까. “흘러가는 게 이와 같도다!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강우규는 안중근 전기를 읽었을까
계봉우

계봉우

1919년 12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기관지 ‘신한청년’ 중문판 창간호에는 박은식이 지은 강우규의 전기가 있다.
 
강우규는 평안도 덕천에서 태어나 함경도 홍원으로 이주했고, 국망 후 북만주 신흥동을 개척해 민족교육에 힘썼다. 신흥동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곧이어 러시아로 떠나 노인동맹단에 합류했는데, 이때 박은식과 수십 일을 함께 지냈다. 강우규는 기독교 신자라서 술을 하지 않았으나 박은식과는 조금 대작했는데, 열세 살 손녀 강영재가 학업도 성실하고 서예 천재라며 늘 손녀를 칭찬했다.
 
강우규는 안중근의 전기를 읽었을까. 현재 안중근의 전기문학을 지은 한국인 작가로는 김택영·이건승·박은식(중국)·홍언(미국)·계봉우(러시아·사진) 등이 손꼽힌다.
 
이 가운데 계봉우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권업신문에 ‘만고 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했다. 박은식은 상하이의 대동편집국에서 『안중근』을 출판했다. 강우규는 북만주에서는 계봉우와, 연해주에서는 박은식과 함께 머물렀는데, 이들 안중근 전기작가로부터 안중근과 동양 평화를 더 잘 이해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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