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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문화탐색] 재난과 물질 : 코로나 시대의 일본 문화 단상

중앙일보 2020.09.10 00:13 종합 27면 지면보기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코로나 사태에도 꺼지지 않는 일본의 골판지 사랑”, “골판지로 전 세계적으로 망신당한 일본, 이번에는 자판기까지 출시?” 인터넷 기사의 제목들이다. 내용을 보면, 골판지는 아베 내각의 소울(?) 아이템이다, 2020 도쿄올림픽의 선수촌 침대를 골판지로 만들려고 했다가 올림픽이 취소되자 코로나로 인해 공항에 격리된 사람들을 수용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관공서와 사무실의 칸막이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코로나가 유행하자 심지어는 골판지 간이 셸터, 워킹 스루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골판지 사랑의 이유로는 아베 총리의 형이 골판지 회사 사장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덧붙여진다.
 

아크릴 대신 골판지 고집
문화심리적 요인이 작용
연약한 경박단소의 미학
중후장대 서양미와 대비

기사 중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것도 많고, 그냥 한국인의 혐일(嫌日)의식이 지어낸 것은 아닐까 싶은 것도 있다. 그런데 만약 이 기사들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골판지가 뭐기에, 일본인들은 이렇게까지 골판지를 사랑하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서도 칸막이가 등장했지만 재료는 주로 투명 아크릴이다. 일본인들이 굳이 골판지 칸막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값이 싸다거나 가볍다거나 하는 실용적인 이유보다도 문화적이거나 심리적인 요인이 더 근저에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일본 사가현의 중학교 교실에 설치된 골판지 칸막이. [사진 다케오기타중학교]

일본 사가현의 중학교 교실에 설치된 골판지 칸막이. [사진 다케오기타중학교]

한국인들은 한지(韓紙)를 자랑하지만 세계적으로는 ‘와시(和紙)’라고 부르는 일본 종이가 잘 알려져 있다. 종이는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아랍을 통해서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나중에는 인쇄혁명과 결합하여 근대화의 연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기의 일본 종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서양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종이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유럽의 대리석만큼이나 문화를 상징하는 물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종이는 무엇보다도 에도시대의 풍속화인 우키요에나 일본 부채와 우산 등이 불러일으킨 자포니슴(Japonisme, 일본 취향)과 뗄 수 없는 재료였다. 서양인들은 일본인들이 나무·볏짚·종이로 만든 집에 산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밝고 가볍고 연약한 일본집의 이미지는 서양이 무겁고 어두운 느낌의 석조건축 대신에 경쾌한 감각과 형태를 가진 근대건축을 창조하는데 영감을 제공했다.
 
브루노 타우트, 르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근대 건축의 거장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건축에 관심을 보인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는 에세이집 『예술로서의 디자인』에 실린 ‘전통적인 일본 가옥에서 사는 법’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능청을 떤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다행한가.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바닥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불탈 염려가 없다. 그래서 담배를 끄지 않고서도 내던져 버릴 수 있고 문을 마음껏 쾅 하고 닫을 수도 있고…”
 
일본의 카드보드 아티스트 마사키 오다카가 개발한 DIY 마스크를 쓴 여성. [마사키 오다카 홈페이지]

일본의 카드보드 아티스트 마사키 오다카가 개발한 DIY 마스크를 쓴 여성. [마사키 오다카 홈페이지]

종이의 동양적인 이미지가 오리엔탈리즘과 연결됨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서양=남성, 동양=여성으로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하위구조로서의 젠더적인 문법도 들어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도 그런 재현물의 하나다. 이렇듯 종이라는 재료는 근대 일본이 자신을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한몫 했다고 보아야 한다. 서양의 중후장대(重厚長大)의 미학에 대비되는 근대 일본의 경박단소(輕薄短小)의 미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특정한 재난이 반드시 특정한 물질과 친화성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작금의 상황에서 일본과 골판지 사이에는 뭔가 엉뚱해 보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점이 있다. 골판지는 말 그대로 종이와 종이 사이에 골을 만들어 강도를 높인 종이로서 더 이상 일본의 전통 종이인 와시처럼 우아하고 연약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일본의 특촬물(슈퍼 히어로나 괴수가 등장하는 특수 효과를 살린 영상물)에 나오는 슈퍼 히어로가 뒤집어쓴 갑옷 같다.
 
어쩌면 이는 근대기에 서양에 대해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포지셔닝한 일본이 이제 그로부터 벗어나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채택한 재료일지도 모른다. 로봇 같은 마스크를 한 여성의 모습에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예전 일본에 갔을 때 지하도 안에서 노숙자들이 자로 잰 듯이 줄을 맞춘 종이상자 안에서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금 일본인들은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해서 골판지 셸터 안에 숨거나, 아니면 골판지를 판갑(板甲)처럼 두른 슈퍼 히어로로 변신하여 바이러스와 한판 승부를 겨루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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