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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칼럼] 국가의 품격과 성숙한 민주주의

중앙일보 2020.09.09 00:48 종합 31면 지면보기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BTS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고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적 저력에 감탄한다. 외교에서도 우리가 주도하여 G20정상회의를 이끌어냈고, 트럼프 대통령은 G7회의에 호주, 인도, 러시아와 함께 한국을 추가 초청하는 확대 정상회의를 제안했다. 뛰어난 의료시스템과 최고 인재들이 모인 의료진의 헌신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방역의지로 코로나 19 위기극복도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경제성장·민주화 이후 고민할 때
기업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정치도 성숙한 민주주의로 변해야
사회지도층이 국가품격에 책임

이처럼 해외에서 바라보는 국가 이미지는 올라가고 있는데 진정한 우리 모습은 어떤가? 지난 반세기 우리는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경제는 쌓기만 했고, 정치는 부수기만 했다. 경제는 수출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으로 평가받았고, 정치는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으로 평가받았다. 이를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과 정치선진화를 동시에 이룬 우리나라는 오늘 이에 걸맞은 선진국의 품격을 갖추고 있는가.
 
정치인들이 연일 막말과 호통, 그리고 비아냥거림으로 국민들을 피곤하게 한다. 언론도 이런 정치인들을 소재로 막장 드라마같은 뉴스를 매일 양산해내고 있다. SNS로 개인들의 의견이 여과없이 노출되고 심지어 개인방송까지 활성화되면서 사회전체가 홉스의 ‘만인대만인의 투쟁’처럼 감성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정치인들이 편가르기를 일삼으며 자기편이면 무엇이든 선이고 상대편이면 어떤 경우에도 흠을 들추어내는 품격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10여년전 일본에서는 오차노미즈 대학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 명예교수의 책 『국가의 품격』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미국 콜로라도대학과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한 후지와라 교수는 전공인 수학을 넘어 다양한 사회비평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책에서 후지와라 교수는 일본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기대어 중우정치(衆愚政治)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나치는 주권재민,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의 전형인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적 선거를 통해 등장했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이 독일 국민들은 나치와 히틀러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면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했다. 그는 이런 역사적 교훈에서 일본이 중우정치를 넘어 품격있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쌓기만 하던 시장이 이제 자신을 허물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이후 탐욕적인 자본주의가 지속가능성을 고민한 것이다. 8천조원 운용자산의 세계 최대 투자회사 블랙록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책무성을 중요한 투자조건으로 삼는다. 3천조원의 J.P. 모건도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와 연관된 회사에는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다고 올해 선언했다. 마이크로 소프트는 자신의 기업활동을 유엔 지속가능목표인 SDG 지표별로 평가하여 발표한다. SK도 기업생산에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고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집단들을 연결하는 SOVAC(Social Value Connect) 행사를 매년 주관한다. 포스코도 회사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시민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작년에는 철강회사 최초로 6천억원에 달하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채권을 발행하여 사회적 책임투자에 한발 앞서고 있다. 젊은이들은 가성비가 아니라 가심비를 우선하고 오뚜기를 갓뚜기라고 하면서 경제적 가치보다 사회적 가치를 소비하려고 한다.
 
허물기만 하던 정치도 이제는 미래를 위해 쌓는 노력을 해야 한다. 기득권을 비난하고 과거를 부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미래를 잘 쌓기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최근 대통령의 권력집중과 다수결의 횡포에 비판적인 원로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가 일찍이 지적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왔다. 권위주의 제도가 바뀌어도 정치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당 지도부의 눈치만 보고, 포퓰리즘 표만 구하는 국회의원들의 행태로는 국가의 미래가 암담하다. 선출된 국회의원이라면서 임명직 공직자를 하대하고 합리적 논리보다는 답변태도가 불량하다고 호통치는 감정적 대응을 볼 때 시대가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품격없는 정치인들의 SNS나 정당 대변인들의 논평보다 젊잖게 상소문을 올린 한 서민의 호소가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이제 기업은 경제적 이익보다 사회적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 여야 정치인들은 당리당략과 포퓰리즘을 버리고 미래 국가대계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 언론은 극단적 소수 이념집단의 목소리나 품격없는 정치인들의 일상을 증폭시켜 전달하길 멈추고 사회의 목탁이 되어야 한다. 지식인들도 감정적 논리로 상대편을 시니컬하게 비난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합리적 논리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사회의 지도층이 품격을 갖추어야만 국가는 신뢰와 안정을 확보할 수 있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돈만 쫓는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이 바뀌듯 표만 쫓는 탐욕스러운 민주주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만들고 국가의 품격을 바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고민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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