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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소박한 행복을 찾아서

중앙일보 2020.09.09 00:30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코로나 때문에 평범한 일상을 살기는 어려워졌다. 그 때문에 평범한 일상을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제주도에 와서 살면서 맛보게 된 음식 가운데에는 자리물회와 각재기국이 있다. 자리물회는 몸이 비교적 작은, 갓 잡은 자리돔을 잘게 썰어 양념으로 버무린 뒤 물을 부어서 먹는 음식이다. 각재기는 전갱이의 제주도 사투리라고 한다. 배추를 넣고 뚝배기에 담아 끓여낸 각재기국은 국물이 맑고 시원하다.
 

한담을 하는 평화의 때 그리워
평화는 일렁이고 찰랑거리지만
특별한 일 없는 평상시 소중해

제주 서귀포가 고향인 한기팔 시인은 ‘자리물회’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자리물회가 먹고 싶다./ 그 못나고도 촌스러운 음식./ 제주 사투리로/ ‘자리물회나 하러 가주’/ ‘아지망/ 자리물회나 줍서’ 하면/ 눈물이 핑 도는./ 가장 고향적이고도 제주적인 음식./ 먹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톡 쏘는 재피 맛에/ 구수한 된장을 풀어/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여름날 팽나무 그늘에서/ 한담(閑談)을 나누며 먹는 음식.” 한기팔 시인은 가족이 함께 모여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앉아 먹는 자리물회를 “먼 마을 불빛이나 바라보며/ 하루의 평화를 나누는/ 가장 소박한 음식”이라고도 했다. 말하자면 자리물회와 각재기국은 보통의 서민들이 즐기는 참으로 수수한 음식인 셈이다. 그런데 한담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는다는 이 시구에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그 어느 옛 시간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낀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를 조금은 한가하게 나누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헤아리는 것이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느슨하게 사용하면서 ‘못나고도 촌스러운 음식’을 함께 먹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자문해 보는 것이다.
 
여름날 저녁에 들마루를 밖에다 내놓고 더러는 앉아서, 더러는 누워서 이런저런, 끝맺음이 없는 이야기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어머니께서 손으로 직접 반죽을 해 밀고, 칼로 썰어 만든 손칼국수를 먹던 어느 저녁의 작은 행복 같은 것도 생각이 난다. 또 나무 아래 짙은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한담을 하면서 보냈던, 특별한 일이 없었던 보통의 때가 떠오른다.
 
특별한 일이 없었던 보통의 때라니! 사실 우리는 매일매일 평상시(平常時)를 살고 있지만, 이것을 자주 실감하지는 않는 것이 아닐까 한다. 모래사장처럼 평평하고 너르게 펼쳐진 평상(平常)의 시간 말이다. 매시간이 골치 아픈 일로 모두 채워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조하고, 여유가 없이 서두르고, 한담을 즐길 줄을 모르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평화를 나누는 그런 시간조차 쉽게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나도 이러한 형편에 있는 사람일 테지만.
 
다행히 최근 서너 번 찾은 제주도의 오름은 내게 한담과 평화의 시간을 안겨주었다. 오름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겨난 용암이 굳어서 만들어진 작은 산이다. 제주도에는 이러한 오름이 36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제지기오름, 바굼지 오름, 다랑쉬오름, 백약이오름, 따라비오름, 족은노꼬메오름 등 그 이름도 멋지다. 꽤 높은 오름도 있지만, 대개는 봉긋하게 솟아 있다.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형세다. 어떤 오름은 밥그릇을 엎어 놓은 듯 정겹기까지 하다. 완만한 경사의 숲길을 느릿느릿하게 걸어 오름을 다 오르면 저 멀리까지 시야가 트이고, 들판이 펼쳐지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하늘이 사방으로 열린다. 그리하여 조금은 갈등이 없는 평온한 마음에 닿게 된다.
 
이성복 시인은 제주 오름을 마주한 때의 감회를 일찍이 쓴 적이 있다. “입으로 힘껏 고무풍선을 불 때 돌연 의외의 모양이 부풀어 오르듯이, 압축된 소리들이 새를 닮은 나무, 나무를 닮은 바위의 모습으로 가까스로 자신을 내밀 때, 둥근 빵처럼 멎어 있던 오름의 평화는 순간적으로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평화의 깨어짐이라기보다는 평화의 일렁거림, 평화의 찰랑거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사실, 정말로 그러할지 모른다. 도도록하게 나온, 소복하게 솟은 하나의 오름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평화는 일렁거리고 찰랑거릴 뿐 깨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덜 조급해하고, 조금은 의연한 척도 하면서, 딴청을 피우는 척도 하면서 산다면 말이다. ‘못나고도 촌스러운 음식’을 먹으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잠깐씩 각별할 것 없는 평범한 때를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소박한 행복의 내용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지금의 때가 분명 비상(非常)한 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의 때를 애써 발견해나갔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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