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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n번방 고객? 교수가 디지털교도소 증거조작 밝혔다

중앙일보 2020.09.09 00:19 종합 2면 지면보기
채정호 가톨릭대 의대 교수

채정호 가톨릭대 의대 교수

평범한 일상이 지옥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지난 6월 29일 월요일 아침, 저명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채정호(59) 가톨릭대 의대 교수의 휴대전화로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방송국 카메라도 채 교수가 근무하는 병원 앞에 진을 쳤다. 기자들은 똑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채 교수님, 디지털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되셨어요. 성착취 영상 구매하려 하신 것이 맞나요?”
 

동영상 거래 당시 대화 캡처 화면
폰 기종 다르고 포토샵 흔적까지
“다른 피해자는 죽음 생각했을 것
난 정신과 의사라 버틸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채 교수는 “네? 그런 사실 없습니다”라고 서둘러 전화를 끊은 뒤 인터넷을 찾아봤다. 그가 처음 ‘디지털교도소’를 접한 순간이었다. 디지털교도소는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 ‘n번방’ 사건 이후인 지난 3월 일종의 ‘자경단(自警團)’을 자처하며 만들어진 사이트다. 성범죄자 추정 인물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디지털교도소엔 채 교수의 신상과 휴대전화 번호, 그처럼 보이는 인물이 성착취 동영상을 구매하려고 시도한 텔레그램 대화 캡처 화면이 사흘 전부터 게시돼 있었다. 이후 채 교수의 휴대전화엔 각종 욕설이 담긴 카톡과 메시지가 쏟아졌다. “니 교수 맞냐?” “죽을 준비 해” “하나님은 너같은 ××를 자녀로 둔 적 없다. 탈기독교 해” 같은 거였다. 새벽마다 모르는 번호로 휴대전화가 울려댔다. 많을 땐 수백 건에 달했다.
 
이런 상황은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 그가 장로로 있는 교회 목사와 신자들에게도 알려졌다. 억울하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지인이 있자 채 교수는 경찰 수사를 택했다. 불명의 디지털교도소 운영자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경찰은 지난 7월 말부터 2주간 포렌식에 나서 메시지 9만9962건, 브라우저 기록 5만3979건, 멀티미디어 사용 내역 8720건을 샅샅이 들여다봤다.
 
1, 2 채정호 교수와 그의 변호인단이 밝혀낸 디지털교도소 텔레그램 대화 허위사실 증거 중 일부. 3 디지털교도소를 수사하는 대구지방경찰청이 보낸 공문 캡처. [사진 채정호 교수]

1, 2 채정호 교수와 그의 변호인단이 밝혀낸 디지털교도소 텔레그램 대화 허위사실 증거 중 일부. 3 디지털교도소를 수사하는 대구지방경찰청이 보낸 공문 캡처. [사진 채정호 교수]

디지털교도소 수사를 전담하고 있는 대구지방경찰청은 8월 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윤리위원장에게 ‘고소인 채정호 고소사건에 대한 의견 회신’ 공문을 보냈다. 채 교수의 휴대전화에는 디지털교도소에 게재된 것과 같은 ‘텔레그램 대화’나 성착취물을 구매하려는 것으로 의심할 만한 대화·사진·영상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호인과 지인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텔레그램 대화의 ‘포토샵 흔적’도 확인했다. 채 교수는 안드로이드폰을 사용하는데, 해당 텔레그램 대화가 아이폰을 통해 이뤄진 증거도 발견했다. 경찰은 현재 해외에 거주 중으로 알려진 디지털교도소 운영자를 추적하고 있다.
 
채 교수는 8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실제 교도소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두 달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6월엔 이미 조주빈의 n번방이 사회의 중심 이슈로 떠올랐던 시점인데 제가 왜 신분을 공개하며 성착취 영상을 구매하려 했겠느냐”고 반문한 뒤 “저는 자살을 막는 정신과 의사라 버텼지만 다른 피해자라면 죽음까지 생각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수사 과정에서 “인격적 살인을 당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가 심각한 사회현상이란 것엔 공감하지만 사법 체계를 무시한 사적 복수는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디지털교도소 사이트가 8일 오후부터 접속이 안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403 Forbidden’이라는 오류 메시지가 뜬다. 디지털교도소 운영진이 사이트를 폐쇄했는지, 다른 이유로 차단된 것인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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