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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한국, MMT 따라가나

중앙일보 2020.09.08 00:26 종합 25면 지면보기
서경호 경제에디터

서경호 경제에디터

‘재정 적자는 걱정하지 마라. 자국 통화를 얼마든지 찍어내면 된다. 실업자가 있고 노는 공장이 있는 한, 정부는 완전고용의 그 날까지 재정 지출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한때 이단 취급받던 현대화폐이론
금융위기·코로나 거치며 주목받아
돈 찍어 기본소득 주면 그게 MMT

이런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MMT)은 정통 경제학계에선 인정받지 못한 비주류 경제학이다. 아예 이단 취급을 받기도 한다.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전 재무장관)는 지난해 MMT를 ‘재앙의 레시피’라고 비판한 데 이어 최근에는 ‘무당 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불렀다. 유명 투자가인 워런 버핏도 ‘미친 이론’이라고 단칼에 보내버렸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선 MMT 지지자가 여럿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진보 정치인 버니 샌더스와 진보의 젊은 아이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 등이 MMT의 지지자로 유명하다. 제레미 코빈이 이끌던 영국 노동당,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 포데모스 등 좌파에서 인기가 많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이 돈을 뭉텅이로 풀었지만 인플레이션은커녕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지경이니 MMT 진영은 기세등등하다. MMT의 대표학자인 L 랜덜 레이는 『균형재정론은 틀렸다(원제 ‘Modern Money Theory’)』 서문에서 쇼펜하우어의 경구를 비튼 이 말을 인용했다. ‘MMT는 세 단계를 거치는데, 1단계에선 조롱을 당하고, 2단계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며, 3단계에선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소리로 여겨질 것이다.’ 물론 지금 3단계에 들어섰다는 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지금은 현실이 MMT 이론을 좇아가는 형국이다.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정·통화정책을 쏟아붓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달 2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한국은행 업무보고 자리에서 여당 국회의원이 MMT를 거론해 눈길을 끌었다.
 
서소문 포럼 9/8

서소문 포럼 9/8

“미국·유럽·일본 등은 유동성을 무차별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추후 금리정책이 더 이상 실효적이지 않으면 한국형 양적완화나 MMT도 적극 검토해야 하지 않나?”(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일부 학자들이 소위 MMT니 헬리콥터 머니 등을 얘기하지만 현재로서는 부작용이 상당히 크다고 본다. 본격적으로 MMT를 채택한 나라는 없다고 봐야 한다.”(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한은만 부정적인 게 아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도 화폐를 찍어 재정 적자를 충당하는 게 문제없다는 MMT의 대원칙에 ‘틀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는 지난해 “재정을 무모하게 쓰면 초(超)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재정 당국이나 청와대는 좀 더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을까. 기획재정부는 지난주 역대 최대 규모인 556조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을 내놨다. 내년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6.7%로 올라서고 4년 후면 60%에 육박한다.
 
국가채무 비율 40%가 무슨 금과옥조는 아니다. 절대적인 숫자보다 나랏빚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케인스의 미인대회에선 내 생각이 아니라 군중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순위를 가르는 잣대가 된다. 재정건전성도 시장이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다. 재정 당국이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울림이 없으면 소용없다.
 
물론 MMT가 주목받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누구도 요즘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생기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정부가 경제난과 실업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미 낮아진 기준금리 탓에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힘을 쓸 수가 없다. 원하는 만큼 돈을 찍어서 헬리콥터에서 뿌리면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 발권력을 동원해 직접 가계와 기업을 지원하는 각국의 모습은 MMT 주장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결국 MMT도 정도의 문제다. 무한정 돈을 찍어 재정 지출을 하면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 남미가 그랬고, 그리스 등 남유럽도 그랬다. MMT가 혹평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다.
 
한국은 MMT를 얼마나 따라가고 있나. 재정 규율이라는 굴레는 벗어던졌지만 본격적으로 한은의 발권력까지 동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가까이 있기도 하다. 한은이 발권력으로 돈을 찍어 헬리콥터로 기본소득을 뿌리면 그게 바로 MMT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단어들이다.
 
서경호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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