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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부대 만든 그 말…"박정희 목 따러 왔다"

중앙일보 2020.09.05 05:00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내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김신조 북한 공작원·1968년 1월 22일 남한 기자회견)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남북 갈등 역시 최고조였다. 1953년 정전협정 후 잠잠하던 휴전선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남북은 ‘전선(戰線) 공작’으로 불렀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불사했다. 특히 북한은 1967년 이후 집요하게 게릴라 공격에 매달렸다. 미군이 주둔해 있는 남한을 적화 통일하려면 전면전보다 게릴라전이 유리하다고 봤다.

[그날의 총성을 찾아…실미도 50년]③비극의 씨앗, 김신조 부대

 

북, 김신조 부대 ‘박정희 멱 따러’ 급파

북한은 급기야 ‘김신조 부대’를 남파한다. 1968년 1월 21일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소속 31명의 게릴라 부대로 청와대를 급습했다. 김신조의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말대로 박 대통령 암살이 목표였다. 북한이 당초 계획한 부대 규모는 76명, 공격 목표도 청와대뿐만 아니라 육군본부, KBS, 공안 사범 수용소, 미국 대사관 등 광범위했다. 하지만 작전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부대원은 31명으로 줄이고 타깃도 청와대로 좁혔다. 북한은 당시 3단계 적화 통일 작전을 짰다. ①박 대통령 살해 ②8개 도에 공작원 1000명씩 남파해 전국 장악 ③인민군 공격으로 적화 통일 마무리 순이다. 3단계 작전의 시한은 단 20일이었다.  
 

“부대원을 선발할 때 노동당원 등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만 뽑았습니다. 어떤 지령을 내려도 100% 받아들일 충성심이 있어야 하니까요. 키는 적당해야 하고 얼굴은 표준형이어야 했습니다. 말하는 것도 서울말을 해야 했습니다. 경계심을 최대한 줄일 목적이지요. 지능이 높아야 하는 것도 선발 조건이었습니다.”(현재 김신조 목사·2020년 8월 14일 중앙일보 인터뷰)

청와대 전경. 중앙포토

청와대 전경. 중앙포토

 

北 출발 닷새 만에 청와대 자하문 도착  

김신조 부대는 1968년 1월 16일 밤 북한 황해북도 연산군에서 출발했다. 다음 날 남방한계선을 넘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지령을 갖고 청와대로 진격하던 김신조 부대는 19일 파주시 야산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와 마주친다. 공작원들은 4형제를 제거하려 했지만,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땅 때문에 망설였다. 부대원 사이에서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땅에 어떻게 시체를 묻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죄 없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를 죽여야 하느냐”는 반문도 있었다. 김신조 부대는 다수결 끝에 4형제를 풀어줬다. “신고하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을 잊지 않았다.
 

파주 나무꾼 우씨 4형제의 신고   

김신조 부대는 북 출발 닷새 만인 21일 밤 10시쯤 청와대 지척에 도착했다. 청와대 공습 계획을 다시 숙지했다. 막 자하문 초소를 통과할 즈음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우씨 4형제가 풀려나자마자 파출소로 달려갔고, 군과 경찰은 즉각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김신조 부대는 검문에서 “우리는 CIC(당시 남한 육군 방첩부대) 소속으로 특수훈련 뒤 복귀중”이라고 외쳤다. 종로서 경찰은 물러서지 않았고, 김신조 부대는 사격을 개시했다. 결국 공작원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월북,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는 투항했다. “파주에서 우씨 4형제를 살해했다면, 박 대통령 암살 지령도 성공하고, 적화 통일로 이어졌을 것”이란 게 김신조씨의 회상이다.
 
김신조씨가 1·21 사태 이후 동료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신조씨가 1·21 사태 이후 동료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중앙포토

北, 김신조 남파 이어 美 푸에블로호 나포

청와대 습격 시도 이튿날 김신조는 수갑을 찬 채 기자들 앞에 섰다. 그는 거친 말투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소리쳤다.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그 와중에 북한은 바로 다음 날 미 함정을 나포했다. 원산항 근처에서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와 미 승무원 83명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김신조 부대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한반도엔 전쟁의 기운이 스멀거렸다.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복을 다짐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박 대통령을 뜯어말렸다. 박 대통령은 1월 하순부터 2월 19일까지 주한 미국대사 포터를 10여 차례나 만나야 했다. 
 

“한국 정부 수뇌부는 당시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까지 침투한 상황에서 보복은 불가피하다며 강경한 입장이었습니다.” (장지량 당시 공군참모총장·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면담)

 
미국은 당시 베트남전 장기화로 지쳐있었다.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원치 않았다. 푸에블로호 승무원의 안전한 복귀를 원하는 미국 내 여론도 비등했다. 남북 갈등에 개입하지 말라는 남한 내 목소리도 컸다. 박 대통령은 1월 26일 전국 군·검·경·중앙정보부·여당이 참여하는 긴급합동안보비상회의를 개최했다. 박 대통령은 ‘독자적인 대북응징보복 방침 수립’을 지시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할 때까지 뭣들 한 겁니까. 중앙정보부장과 공군참모총장은 보복 계획을 세우세요.”(박정희 대통령·1968년 1월 26일 긴급합동안보비상회의) 

 
북한에 나포된 푸에블로호의 로이드 부커 함장과 승무원들이 배에서 끌려 내려오고 있다. 중앙포토

북한에 나포된 푸에블로호의 로이드 부커 함장과 승무원들이 배에서 끌려 내려오고 있다. 중앙포토

 

美 반대 속에 대북 보복 공격 착수 

박 대통령의 지시에 군과 정보 당국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대북 대응 태세 강화가 골자였다. 우선 군복무기간이 3~6개월 늘었다. 예비군이 창설됐고, 육군3사관학교가 설립됐다.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을 시작했다. 남북 전선의 목책을 철책으로 전면 교체했다.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교련 실습이 생겼다. 간첩 억제를 위한 주민등록번호제도 도입이 시작됐다. 그리고, 극비리에 ‘실미도 부대’를 만들었다. 
 

“1968년 김신조 부대 사태 후 국민적 분노에 기반을 둔 실미도 부대 창설은 시대적으로 당연한 임무였습니다. 창설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곤란해요. 과거 국가적인 특수활동이 비하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국가정보원 연락관 A씨·2005년 국정원과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의 워크숍) 

 
다음 회에서는 김신조 부대의 급습에 맞설 대북 보복 공격 계획의 핵심인 실미도 부대 창설을 다룬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실미도 부대의 목표는 분명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의 멱을 따는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미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지휘봉은 군 대신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잡았다. 중정은 김신조 부대를 능가하는 실미도 부대를 만들기 위해 ‘매우 특별한 부대원’을 모집한다.  
 
※2006년 발표된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김민중·심석용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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