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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군 전사자는 루저'…머리 헝클어질까봐 참배 취소"

중앙일보 2020.09.04 17:4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 오는 날 헤어스타일이 망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2년 전 프랑스 내 미군 묘지 참배 일정을 취소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美 애틀랜틱지, 2018년 파리 비화 공개
"내가 왜 패배자 가득한 묘지 가야 하나"
트럼프 강력 반발 "수치스런 가짜뉴스"

당시 일정 취소를 놓고 백악관은 “악천후에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밝혔지만, 실상은 참전용사를 경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평소 시각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소식에 즉시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가짜뉴스”라고 반박에 나섰다.
 
유세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유세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미국 시사잡지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1월 프랑스 방문 중 계획된 엔-마른(Aisne-Marne) 미군 묘지 참배 일정을 “빗길에 머리가 헝클어질까 봐” 일방적으로 취소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현지 사정을 잘 아는 4명의 익명 소식통을 인용하면서다. 이들은 애틀랜틱에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전사자들을 기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 취소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애틀랜틱은 또 이들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한술 더 떠 해당 묘지에 묻힌 미군을 ‘죽임을 당한 얼간이(sucker)’로 규정한 뒤 참배 일정 당일에는 참모들에게 “내가 왜 패배자(loser)로 가득 차 있는 저 묘지에 가야 하느냐”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엔-마른 미군 묘지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벨로 숲(Belleau Wood)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병대원 1800여명이 안장돼있는 곳이다.
2018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지만 기상 악화를 이유로 참배하지 않은 엔-마른(Aisne-Marne) 미군 묘지. [AFP=연합뉴스]

2018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지만 기상 악화를 이유로 참배하지 않은 엔-마른(Aisne-Marne) 미군 묘지. [AFP=연합뉴스]

 
애틀랜틱은 트럼프 대통령이 프랑스 순방길에서 왜곡된 역사관까지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그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누가 선량한 사람들이냐. 미국이 왜 연합군에 개입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참모들에게 속내를 털어놨다는 것이다.
 
이같은 보도 내용은 과거 백악관의 설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백악관은 당시 “날씨로 인해 일정을 실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발표했다.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비가 내려 헬기를 띄울 수 없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때도 백악관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위기가 상당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다른 나라 정상들이 예정대로 일정을 소화한 점을 들어 “트럼프 대통령의 불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윈스턴 처칠의 손자이자 영국 국회의원인 니콜라스 솜스는 트위터에 “참전용사들은 적국과 얼굴을 마주하며 싸웠는데 한심하고 무능한 트럼프는 날씨도 견디지 못했다”고 썼다. 오바마 정부에서 국가안보담당 부보좌관을 지낸 벤 로즈도 트위터에 “대통령 일정 중 비가 내리는 옵션은 항상 있었다”고 꼬집었다.
 
애틀랜틱은 과거 전력을 끄집어내 트럼프 대통령이 참전용사들을 뿌리 깊게 경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주자 시절인 2015년 “해군 조종사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베트남전에서 항공기 격추로 포로가 돼 전쟁 영웅이 됐다”며 “사람들은 붙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해 논란을 빚었다.
 
2018년 9월 매케인 의원의 장례식 때는 장녀 이방카 부부를 대신 참석시키고 평소 주말처럼 버지니아에서 골프를 즐겨 구설에 올랐다.
 
2018년 9월 숨진 존 매케인 전 미국 상원의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고 골프를 쳐서 구설에 올랐다. [로이터=연합뉴스]

2018년 9월 숨진 존 매케인 전 미국 상원의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고 골프를 쳐서 구설에 올랐다. [로이터=연합뉴스]

이 매체는 매케인 의원의 장례식을 놓고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수석보좌관들에게 문제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빌어먹을(fucking) 패배자였고, 저 패배자의 장례식을 지지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고 애틀랜틱은 전했다.
 
애틀랜틱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인식이 금전적 보상이 없는, 거래가 아닌 삶의 선택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물질중심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심리적으로도 죽거나 신체가 훼손되는 데 대한 불안감이 극심해 그런 피해를 받은 사람들도 혐오하게 됐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이 매체는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이 보훈 행사에서 절단 수술을 받은 상이용사가 등장하지 않도록 참모들에게 요구했다는 후일담을 공개했다.
 
해당 보도가 나가자 트럼프 대통령은 강하게 반발했다. 펜실베니아주 유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 내용을 접한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 7분 동안 서 보도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엔-마른 미군 묘지에 가기 위해) 프랑스에서 차로 이동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2시간 이상 가야 해 경호의 어려움이 있어 모두가 반대했다”며 “지금 난데없이 누군가 끔찍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말했다.
 
또 애틀랜틱이 보도한 자신의 참전용사 비하 발언에 대해선 “매케인과는 생각은 달랐지만, 여전히 그를 존경한다”며 “전사자들에게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맹세한다. 어떤 짐승이 그런 말을 하겠냐”고 반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애틀랜틱을 ‘네버 트럼프 잡지(Never Trumper magazine)’라고 표현한 뒤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며 “이런 가짜 언론은 매우 수치스럽다”고 마지막까지 날을 세웠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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