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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국민 다수 지지가 맞나

중앙일보 2020.09.04 00:45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이제 본격적으로 굴러가는 21대 국회에선 버럭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청와대와 정부 책임자들의 고압적 태도가 특히 인상적이다. 각 상임위는 예외가 없고 또 반복적이어서 말하자면 ‘그런 줄 아시고요’ 총출동이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야당 의원 질의를 맞받아치다 소리내 웃는 모습을 보였다. “소설 쓰시네”로 혀를 차게 만든 법무장관은 사과는커녕 “정말 소설 쓰는 정도란 느낌”이라고 불을 더 키웠다. 외교적 언사가 직업인 외교장관까지 “사과 못 드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통계 기반한 정책 설계 아니라
정책 목표 따라 숫자 왜곡하면
현실에서 정책이 과연 먹힐까

대부분 얼마 전까지 국회 의석에서 정부를 상대하던 분들이다. 그때 출석 장관이 자신들처럼 막말을 하거나 호통을 쳤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거다. 수퍼 여당의 든든한 뒷배 때문일 텐데, 문제는 그토록 우겨대는 근거와 잣대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노 비서실장은 ‘정부 부동산 정책을 국민 다수가 지지한다. 여론조사 다 했다’고 핏대를 냈다. 하지만 그런 조사를 본 사람은 없다. ‘우리 편’만 조사하면 그런 숫자가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비슷한 자료라도 제시한 건 아니다.
 
한두 번도 아니다. 문 정부가 인용이나 공개하는 자료는 입맛에 맞는 여론조사뿐이다. 찬반이 들쭉날쭉한 공수처 출범이 그렇고 자사고·외고 폐지가 그랬다. 탈원전이나 보(洑) 철거 등 압도적으로 반대가 많은 불리한 결과를 ‘국민적 판단’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왜곡이 의심되는 경우라도 유리한 결과는 콕 집어 ‘국민의 뜻’으로 포장한다. 이번엔 공공의대다. 권익위가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게 국민 생각’이란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조사엔 공공의대 설립 예정 지역 공무원들이 꽤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여론조사뿐 아니라 정부가 인용하는 통계 수치를 믿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문 정부 출범 후 서울 집값 상승률이 11%’란 현실 왜곡이 있고, 고용·물가·소득 통계는 나올 때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객관적 현실 진단 위에서 나라 정책이 수립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당장 집값이 그렇다. 허술한 통계를 앞세워 안정이라고 고집하면 누가 믿겠나. 내 편만 조사한 뒤 국민 조사로 둔갑시키면 혹시 모를까.
 
영국 총리를 지낸 디즈레일리는 의회에서 항상 통계 수치를 인용해 답변했다고 한다. 두서 없어도 몇 개 수치를 들먹이면 사람들이 쉽게 수긍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세상엔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그냥 거짓말과 빌어먹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란 말을 남겼다. ‘통계 자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가 숫자를 이용할 뿐이다’란 명언과 함께였다. 그래도 그는 통계 조작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국정 책임자의 괴로움은 털어놨다.
 
우린 내 편 여론만 민심이다. 네 편은 가짜뉴스다. 정부가 들이대는 숫자만 듣자면 태평성대가 따로 없다. 과연 그런가. 9월 1일이 통계의 날이었다. 1896년 이날 ‘호구조사 규칙’이 처음 시작됐다. 숫자를 다루는 엄정함이 왕조시대만큼도 못하다고 느끼게 만든 게 바로 이 정부다. 역린(逆鱗) 통계로 경질된 통계청장까지 나왔다. 조사기관이 다르면 아예 정반대 결과를 내놓는 경우도 허다한데 내 쪽만 민심이라고 우기며 핏대 내는 정부가 신뢰를 얻긴 어렵다.
 
적어도 과거 정부는 대놓고 거짓말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불리하다 싶으면 시인도, 부인도 안 하는 식으로 대응하곤 했다. ‘부동산 불안을 다룬 보도는 가짜뉴스’란 가짜뉴스, ‘국민 다수 지지를 받는다’는 어깃장으론 집값을 못 잡는다. 경제도 못 살린다. 경제학자의 76%가 ‘집값 급등은 정부 탓’이라는데 정부는 전 정권 탓, ‘영끌’ 탓이란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만 본다. 그런 분들에게 시무 7조와 영남 만인소 같은 청와대 청원은 읽어볼 가치조차 없는 가짜뉴스의 끝판왕 아니겠나.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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