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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푸틴 정적 나발니, 독극물 노비촉에 당했다”

중앙일보 2020.09.04 00:13 종합 2면 지면보기
독극물 중독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러시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달 22일 독일 베를린으로 이송되기 위해 러시아 옴스크 병원에서 응급차에 실리고 있다. [AP=연합뉴스]

독극물 중독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러시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지난달 22일 독일 베를린으로 이송되기 위해 러시아 옴스크 병원에서 응급차에 실리고 있다. [AP=연합뉴스]

독일 정부는 혼수상태에 빠진 러시아의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신경작용제인 노비촉(Novichok)에 공격당했다고 밝혔다. 슈테펜 자이베르트 총리실 대변인은 2일(현지시간) 성명에서 “나발니가 신경작용제 공격의 희생양이 된 것은 충격적인 일”이라며 독일연방군연구소 검사 결과 나발니에게 노비촉 계열의 화학 신경작용제가 사용됐다고 말했다.
 

“혼수상태 나발니 노비촉 중독” 발표
독성, 김정남이 당했던 VX의 8배
메르켈 “러시아 정부가 대답하라”
푸틴의 벨라루스 관여 등 견제 앞장
미·유럽도 규탄, 러시아는 “증거대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나발니는 살인미수의 희생자”라며 “그의 침묵을 원한 누군가가 독극물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 정부만이 답할 수 있고, 반드시 답해야 할 매우 심각한 질문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발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나발니의 독살 시도엔 러시아가 배후라는 걸 시사한다.
 
노비촉은 옛소련과 러시아가 군사용으로 개발한 초강력 독극물이다. 2018년 3월 영국 솔즈베리에서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 딸 율리아가 노비촉 공격을 받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를 배후로 지목했지만, 러시아는 반발했다. 이후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과 러시아는 서로 외교관 맞추방을 하며 외교 갈등으로 비화했다.
 
독극물 중독 일지

독극물 중독 일지

나발니는 지난달 20일 러시아 톰스크공항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고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는 기내에서 건강 이상을 호소해 시베리아 지역 옴스크에 비상 착륙해 병원에 후송됐으나 의식불명에 빠졌다. 메르켈은 이 소식을 들은 지 2시간 만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메르켈은 나발니를 독일로 데려와 치료하겠으며 사건 경위를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 신중하고 절제된 메르켈이 나발니 사건에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동안 독일을 상대로 한 러시아 측의 공격 의혹에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라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2015년 4~5월 발생한 독일 연방하원 해킹 사건과 지난해 8월 베를린 시내에서 발생한 조지아인 살해사건이 대표적이다. 두 사건 모두 용의자들이 러시아 정보기관 정찰총국(GRU) 요원으로 밝혀지며 독일 정부는 러시아에 책임을 물었지만 러시아는 부인했다.
 
러시아의 팽창정책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제기된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강제 합병과 벨라루스 정국 개입을 발판으로 영향력을 넓히려 하자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독일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이유로 내려진 유럽연합(EU)의 경제 제재를 1년 연장하는 데 앞장섰다.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러시아도 참가시키자는 구상안을 내놓자 독일이 앞장서서 반대했다.
 
여기에 최근 불거진 벨라루스 시위 사태도 긴장을 고조시켰다. 민중 시위로 혼란스러운 벨라루스에 러시아가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자 독일 등 유럽연합(EU)은 반발했다. 메르켈은 “벨라루스 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폭력 사용을 중단하고 루카셴코 대통령은 야권과 대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과 EU 회원국들도 러시아 압박에 동참했다. 존 울리오트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이날 “나발니 독살 시도는 전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며 “미국은 국제사회와 협력해 러시아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악의적 활동을 위한 자금을 제한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러시아 정부는 나발니에게 일어난 일을 반드시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셉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 대표는 “화학무기는 어떤 상황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반발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국영방송 로시야1에서 “독일의 발표는 ‘메가폰 외교’에 불과하다”며 “여기에는 어떤 사실도, 정보도, 증빙 자료도 없다”고 반박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나발니가 베를린으로 이송되기 전 우리는 모든 국제기준에 따라 전면적인 건강검진을 했고, 독성 물질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비촉(Novichok)
옛소련과 러시아가 1971~93년 개발한 신경작용제. 러시아어로 ‘새로운 사람’이란 뜻. 생화학무기 중 가장 강력한 독극물 중 하나로, 2017년 2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한 신경작용제 VX보다 5~8배 독성이 강하다. 이 물질은 운반할 땐 두 부분으로 분리했다가 투여 직전 결합해 액체 형태로 만들 수 있어 추적하기 어렵다. 흡입을 통해 인체에 작용하며 피부·점막을 통해서도 흡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비촉 중독으로 사망해도 심장마비에 따른 사망 사례와 구분하기 어렵다.

 
이민정·석경민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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