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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의 시선] 盧 지지자였던 조은산, 그가 靑저격수 된 결정적 순간

중앙일보 2020.09.03 00:35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재인 대통령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업무보고를 듣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업무보고를 듣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서해 쪽에서 형성된 미풍이 어느새 태풍으로 돌변해 동쪽으로 몰려오더니 북악산을 삼킬 기세다. 인천에 산다는 조은산(필명)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린 '시무(時務) 7조' 상소문이 장안의 화제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정과 인사 실패, 헌법 무시, 외교 무능 등을 절묘한 비유로 풍자해 공감을 얻고 있다.   
 자신을 진인(塵人), 즉 '먼지 같은 사람'이라 부르고 '미천한 소인'이라고 스스로 낮췄지만, 약 1만 4000자에 달하는 '현인(賢人)'의 상소문 속에 담긴 의미는 크고 깊다. 

처음엔 "다주택자는 적폐"라던 조은산
그는 왜 '청와대 저격수'가 됐을까
1차 상소 땐 "대통령·김현미 사랑·존경"
비공개 처리되자 "역적 김현미 파직"
청와대 높은 '불통 담장'에 불만 커져
민심을 대변한 목소리에 응답해야

 조은산은 언제, 왜, 무엇에 그토록 분노했을까. 당초 청와대가 비공개 처리했던 시무 7조 상소문이 들불처럼 빠르게 입소문을 타자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짧게 근황('조은산이 아룁니다')을 올렸다. '폐하의 대변인'처럼 갑자기 나타난 아무개 시인을 가볍게 한 방 먹이더니 다시 은둔 모드로 돌아갔다. 그래서 현묘(玄妙)한 조은산의 존재를 온전하게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다.
인천 시민 조은산(필명)의 '시무 7조' 상소문에 41만명이 동의해 청와대는 곧 답변해야 한다. 장세정 기자

인천 시민 조은산(필명)의 '시무 7조' 상소문에 41만명이 동의해 청와대는 곧 답변해야 한다. 장세정 기자

 그래도 시간을 되돌려 조은산이 지금까지 쓴 4편의 상소문과 다른 글을 두루 찾아 읽어보니 하나씩 퍼즐이 맞춰졌다. 문장의 행간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단서들이 숨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그의 사유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봤다.  
 그가 "피를 토하고 뇌수를 뿜는 심정으로" 격문(檄文) 같은 상소문을 쓴 진짜 이유가 조금씩 드러났다. 조은산은 인천에 사는 39세 박봉의 월급쟁이이고, 등에 업힌 아들과 기저귀 찬 딸을 둔 아빠라고 한다.
 "나는 다섯에서 스물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난방이 되는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으며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몸을 맞대었고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배달일을 시작해 공사판을 전전하여 살아남았다. 나는 정직한 부모님의 신념 아래 스스로 벌어먹었으며 가진 자를 탓하며 더 내놓으라 아우성치지 않았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흙수저' 출신 조은산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1차 상소문('다(多) 치킨자 규제론')을 올린 것은 지난 7월 14일이었다. 국토교통부가 다주택자 징벌적 과세 등을 담은 7·10 부동산 대책을 발표한 직후였다.
 그는 1차 상소문에서 주택을 치킨에 비유해 다주택자들의 횡포를 적폐라고 비판했다. "1인 1 치킨(1가구 1주택)으로 살아가게 해달라"면서 "취득세·양도세·종부세를 강화해 부의 대물림을 막고 평등을 이뤄달라"고 호소했다. 조속한 부동산 규제 시행을 부탁하면서 "사랑합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존경합니다. 김현미 장관님"으로 글을 맺었다. 반어적 표현을 많이 사용해 그의 오묘한 문장 속의 깊은 뜻을 모두 알기는 어려워도 이때까지는 그래도 정부에 대해 감정이 격앙돼 있지는 않았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둘째), 김의겸 전 대변인(오른쪽 첫째)이 대화하는 모습. 노 실장은 서울 강남과 지역구 부동산 처분 문제로, 김 전 대변인은 재개발 부동산 문제로 지탄을 받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둘째), 김의겸 전 대변인(오른쪽 첫째)이 대화하는 모습. 노 실장은 서울 강남과 지역구 부동산 처분 문제로, 김 전 대변인은 재개발 부동산 문제로 지탄을 받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런데 비유적 표현이었다지만, 특정 업체의 실명('호식이 두 마리 치킨')을 언급한 것이 빌미가 돼 청와대는 1차 상소문을 비공개로 돌렸다. 조은산의 고백처럼 막걸리에 취기가 오른 뒤에 상소문을 쓴 탓이었을까.  
 발끈한 조은산은 바로 다음 날 "폐하, 소인 상소문에 마음이 상하셨사옵니까. 그리하여 비공개하셨는지요"라며 억울해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수정된 청원, 즉 2차 상소문('역적 김현미를 파직하시옵소서')을 올렸다.  
 2차 상소문부터 "중생들의 사다리를 걷어찬" 김현미·노영민·김의겸을 '역적'이라 혹평했다. '개·돼지들의 왕'이란 노골적 표현도 등장했다. 군주론을 들어 훈계하고 경제 실정을 열거한 뒤 "폐하, 반성하시옵니까"라며 힐문했다. 
 "즉시 역적 김현미를 파직해 무너진 부동산 시장 질서를 회복하라"고 촉구했으나 역린을 건드린 이 상소문도 비공개 처리됐다. 조은산은 비판과 풍자의 강도를 더 높여 8월 12일 3차 상소문('시무 7조')을, 24일에는 4차 상소문('뉴노멀')을 연거푸 올렸다.  
 생생한 민생 현장 목소리가 구중궁궐(九重宮闕) 담벼락의 불통에 계속 막히자 조은산은 더욱 격분했다. 4차 상소문에서 "여민관(청와대) 간신배의 농간에 찢겨버린 소인의 상소가 떠올라 망연자실해 길게 울었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런데 청와대가 대통령과 정부를 저격하는 상소문을 감춘다는 비판이 때마침 제기됐다. 결국 보름 만에야 시무 7조 상소문이 빛을 보게 된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시무 7조 상소문을 읽었느냐"는 야당 의원 질의에 "읽지 않았다"고 했다. 조은산은 부동산 대책을 23회나 쏟아낸 김 장관을 "역적"이라 혹평하면서 즉각 파면을 촉구했다. [중앙포토]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시무 7조 상소문을 읽었느냐"는 야당 의원 질의에 "읽지 않았다"고 했다. 조은산은 부동산 대책을 23회나 쏟아낸 김 장관을 "역적"이라 혹평하면서 즉각 파면을 촉구했다. [중앙포토]

 갈수록 농도가 짙어진 4편의 상소문을 관통하는 조은산의 핵심 관심사는 부동산 정책이었다. 시무 7조의 제1조가 "세금을 감하시옵소서"였다. "세율은 민심의 척도"라면서 "망가진 조세 제도를 재정비하시라"고 대안도 제시했다. 조은산의 상소문은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한 명문장이다. 권력자가 그저 웃고만 넘기기에는 구구절절이 폐부를 찌른다.
 조은산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진보 성향이었지만, 현재는 진보·보수 어느 쪽도 아니라며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
 조은산의 상소문은 이미 청와대 답변 요건(20만명 동의)을 훌쩍 넘겼다. 취임 선서 때부터 유달리 소통을 강조해온 '금상(今上) 폐하'가 이제 민심에 응답할 차례다.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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