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로존 'D의 공포'…코로나ㆍ약달러에 4년만에 디플레 빠져

중앙일보 2020.09.02 17:39
저물가 주위를 맴돌던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현실화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이 4년 3개월 만에 디플레이션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중앙은행과 각국 정부가 돈을 쏟아붓는 데도, 경기 부진 우려가 물가를 끌어내린 것이다.
 
유럽연합(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는 1일(현지시간) 8월 유로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0.2%라고 밝혔다. 지난 7월 0.4%이던 물가상승률은 한 달 만에 하락세로 방향을 틀었다. 2016년 5월(-0.1%) 이후 4년 3개월 만에 찾아온 디플레이션이다. 시장과 당국은 “충격적”이란 반응이다. 
4년 3개월만에 디플레이션 빠진 유로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4년 3개월만에 디플레이션 빠진 유로존.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D의 공포’는 예견된 현상이다. 지난 5월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이 0.1%를 기록하면서 위기감은 고조됐다. 유로존을 디플레이션으로 몰아넣은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재확산세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코로나19 환자가 늘어나며, 독일과 이탈리아 등 12개국에서 디플레이션이 나타났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국제 유가 하락과 함께 독일의 부가가치세 인하, 프랑스·이탈리아ㆍ벨기에 등의 여름 할인행사 연기 등이 8월 물가를 끌어내렸다고 분석했다.
 
미국 달러 약세에 따른 유로화 강세도 디플레이션을 부추겼다. 수입 물가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1일 장중 한때 유로화 가치는 1.2달러를 넘어서며 52주 신고가를 경신했다. 주요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인덱스도 지난 3월 고점과 비교해 11%가량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유로존의 디플레이션 장기화 우려다. 우선 달러 약세가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평균물가목표제를 도입하면서 사실상 ‘장기 초저금리 시대’를 천명한 탓이다. 울프 린달 AG 바셋 외환전략가는 로이터 인터뷰에서 “앞으로 1년 안에 유로화 대비 달러가치가 36%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1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유로존이 4년3개월만에 디플레이션에 빠지면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ECB)의 고민도 깊어지게 됐다. [연합뉴스]

유로존이 4년3개월만에 디플레이션에 빠지면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ECB)의 고민도 깊어지게 됐다. [연합뉴스]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 인플레이션도 떨어지고 있다. 유로존의 8월 근원 인플레이션은 0.4%를 기록했다. 7월(1.2%)과 비교하면 낙차가 크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15년의 최저치(0.6%)를 밑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늘면서 소비가 더 위축되면, 물가 하락 폭이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가 하락→소비 연기→생산 감소→기업 경영난→임금 감소와 실업→소비 감소로 이어지는 ‘D의 악순환’에 대한 걱정이다. 
 
유로존에 긴장감이 더 커지는 것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카드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대응은 금리를 내리거나, 재정을 투입하는 식으로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금융위기 이후부터 확 늘어난 시중 유동성으로 인해 이런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이른바 ‘아마존 효과’까지 더해진 형국이다. 아마존 효과는 유통 혁신, 국제 공급망 확대 등으로 인해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신환종 NH투자증권 FICC리서치센터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역대 가장 많은 규모의 유동성 공급이 이뤄지며 대부분 국가에서 통화량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며 “세계금융위기 사례에 비춰볼 때 통화량이 급증해도 화폐 유통속도가 하락하면서 물가 상승 압력으로는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유럽의 통화당국은 결국 돈을 더 풀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른 묘수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베렌버그의 플로리안 헨제 이코노미스트는 FT와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이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12월에 자산매입 프로그램 연장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ECB는 코로나19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올해 말까지 1조3500억 유로 규모의 유로존 국채를 사들일 계획이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