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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국내 건축가 작품집에 주택 프로젝트가 없는 이유

중앙일보 2020.09.01 09:00

[더,오래]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40) 

과거 택지개발지구에 모양도 크기도 동일한 집을 연이어 지은 적이 있다. 소위 집장사가 지은 집이다. 필지 크기가 동일하니 집 설계도면 하나를 가지고 똑같은 집을 여기저기 지어 팔았다. 그 시절 집장사도, 건축사사무소도 돈을 잘 벌었다. 건축사는 건축허가 신청서와 도면 개요에 집 주소만 고쳐 동일한 설계도면으로 허가를 받고 현장에 넘겼다. 집장사처럼 설계도면 장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지인이 주택을 지으려고 한다고 해 그 가족에게 맞는 집의 기본 디자인을 만들어 준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사무소에서는 지인의 주택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업무가 많아 해당 구청 인근 건축사사무소에 설계와 인허가를 의뢰하라고 양해를 구했었다. 얼마 후 인허가가 완료되었다고 받아온 설계도면을 보니 내가 만들어 준 기본계획안과 전혀 다른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건축설계 개요에 기재된 지번을 보니 지인의 소유필지가 아닌 엉뚱한 지번이 기재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건축계 거장들의 작품집을 보면 주택프로젝트가 거의 없다. 대형 건축사사무소는 주택설계를 하지 않는다. 이유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pikist]

우리나라 건축계 거장들의 작품집을 보면 주택프로젝트가 거의 없다. 대형 건축사사무소는 주택설계를 하지 않는다. 이유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pikist]

 
건축사사무소를 방문해 자초지종을 따져 물었다. 건축사는 없고 실장이 가져온 도면 원본을 보고는 감정을 자제할 수 없었다. 내가 만들어 준 기본 계획안은 폐기처분하고 동일한 크기의 다른 필지에 설계된 도면을 지번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같은 건축 설계 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계 장사를 하는 건축사사무소의 실체를 내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 파렴치한 건축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시절 그런 건축사는 실장에게 모든 권한을 맡겨놓고 사무소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난동에 가까운 나의 행동이 벌어졌고 며칠 후 내 기본 계획대로 설계가 변경된 도면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주거문화를 망친 주범이었다.
 
 
우리나라 건축계 거장의 작품집을 보면 주택 프로젝트가 거의 없다. 심지어 주택은 설계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건축가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형 건축사 사무소는 주택설계를 하지 않는다. 이유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 건축사 사무소를 유지하려면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해야 한다. 주택은 규모가 작아 설계비가 적다. 그에 비해 일은 상당히 많다. 건축주의 요구대로 디자인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공간도 형태도 건축가 마음대로 디자인할 수 없다. 프로젝트마다 건축주의 요구사항도 다르다. 건축주와 수시로 협의해야 한다. 집의 규모나 디자인도 매번 다양해진다. 하나의 디자인 언어로 여러 집을 설계할 수 없다. 
 
주택설계는 작은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단 1㎡가 공간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설계비는 적은데 이렇게 복잡하니 대형 건축사 사무소에서 수행하기 곤란하다. 그 정도의 노력과 시간이면 주택설계비의 수십 배 규모의 설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주택은 대부분 소형 건축사 사무소에서 수행한다. 그러나 소형 사무소는 인력이 적어 건축주가 원하는 품질의 설계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게다가 아직도 주택설계에 있어 수준 미달인 사무소가 많다. 수도권의 주택단지를 돌아보면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주택설계는 작은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단 1㎡가 공간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설계비는 적은데 이렇게 복잡하니 대형 건축사사무소에서 수행하기 곤란하다. [사진 pikist]

주택설계는 작은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단 1㎡가 공간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설계비는 적은데 이렇게 복잡하니 대형 건축사사무소에서 수행하기 곤란하다. [사진 pikist]

 
온통 코로나19에 매몰된 요즘 많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불안과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 미래에도 코로나19와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두가 실감하고 있듯이 앞으로 주택 공간은 다양한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재택근무에 필요한 공간과 디지털 환경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분출될 것이다.
 
타인과 오프라인 소통이 단절된 생활로 모든 사람이 답답하지만, 친구와 어울려야 하는 어린이에겐 되돌릴 수 없는 그 시기의 소중한 시간을 앗아가 버린다. 또한 디지털 환경에 취약한 노인과 1인 가구의 주거 공간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거에 있어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명제를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볼 시간이 되었다. 건축가 또한 주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프리랜서 건축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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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웅익 손웅익 프리랜서 건축가. 수필가 필진

[손웅익의 작은집이야기]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집, 투자와 과시의 대상으로의 집에서 벗어나 집은 살아가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건축가이자 수필가인 필자를 통해 집의 본질에 대해, 행복한 삶의 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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