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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아베 정권이 남긴 것

중앙일보 2020.09.01 00:25 종합 25면 지면보기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근 손에 든 책이 소설 『나폴레옹』이라고 한다. 일본의 서양 역사소설 권위자인 사토 겐이치의 작품으로 모두 3편이다. 1편이 대두(부상), 2편이 야망, 3편이 전락이다. 아베는 2편까지만 읽었다. “그 후로는 나폴레옹이 몰락해가는 것뿐”이라는 이유였다(니혼게이자이신문). 절대 권력의 끝자락은 한가지라는 것일까. 파란만장의 프랑스 영웅을 택한 것도, 전성기까지만 본 것도 흥미롭다.
 

‘리더십 초흑자 시대’ 끝나기 시작
저출산·초고령의 시대 난제 맞선
낙관적 도전이 장수 비결일지도

7년 8개월인 아베 정권의 퇴진 함의는 적잖다. 일본에서 ‘리더십 초(超)흑자 시대’의 끝이 시작됐다. 아베의 장기 집권은 일본 정치의 무기력증이 출발점이다. 2012년 재집권 전 아베를 포함한 총리 6명의 평균 임기는 1년이었다. 참의원의 여소야대가 한몫했다. 장기 집권은 ‘결정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아베 1강(强) 체제는 스스로 쌓아 올렸다. 중·참의원 선거에서 6연승 했다. 더불어 대통령적 총리가 됐다. 내각에 인사국을 설치해 거대 관료집단의 인사를 장악했다. 아베는 자민당 사상 최장만이 아닌 최강의 총리였다.
 
그 새 자민당도 바뀌었다. 이념의 스펙트럼이 단조로워졌다. 반주류·비주류의 씨가 말랐다. 소선거구제로 당 공천에 대한 집행부 영향력이 커지면서다. 아베 퇴장이 가져올 공백은 커 보인다. 차기 총재 후보군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기시다 후미오 정조회장의 존재감은 아베에 견주기 어렵다. 이들엔 아베 1차 집권 때부터 함께 해온 친위대 비서관이 없고, 외곽의 우파 후원 단체도 아베만 못하다. 일본 특유의 가문 후광도 비교가 안 된다. 자민당은 다극(多極) 연합체의 본모습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서소문 포럼 9/1

서소문 포럼 9/1

아베는 보통국가 일본의 길을 텄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법적 족쇄를 풀었다. 아베의 역사 수정주의는 동북아 역사 전쟁의 불씨였다. 전후 70년 담화 중 “일·러 전쟁이 식민지 지배하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 용기를 주었다”는 구절은 아베 역사관의 결정판이다. 도쿄의 취재 현장에서 접했을 때의 울화통이 생생하다. 아베는 우파 이데올로그이지만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중국의 급부상과 미·중 충돌, 일본의 상대적 퇴조, 트럼프 리스크 속에서 실사구시의 외줄 타기 외교를 폈다. 미·일 동맹,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기조 아래 중국과의 데탕트를 모색했다. 중·일은 구동존이(求同存異)의 길을 갔지만, 한·일은 역사 전쟁의 연장 선상이다. 중국과 북한을 보는 한·일의 전략적 시각차도 크다. 한·일 관계 리셋 기대는 섣부르다. 아베 퇴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김이 역내에서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두 정상은 사실상 종신 임기의 현대판 황제, 차르다.
 
아베의 내정은 간판 정책의 연속이었다. 저출산·고령화를 국난으로 규정하고 정면 돌파에 나선 것은 인상적이다. 정치인은 단기적 성과가 나지 않는 사안을 피하기에 십상이다. 저출산, 고령화(65세 이상 28%), 지방 소멸 대책을 접목한 지방창생(創生) 전략은 대표적이다. 도쿄권 인구 집중을 완화하고, 일자리와 사람을 부르는 선순환의 지방을 만들겠다는 정책이다. 여기에는 도쿄권 출산율이 지방보다 낮아 출생수를 낮춘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1억총활약사회’는 인구 감소와 초고령 시대의 역발상이었다.
 
분야별 실적은 들쭉날쭉하다. 젊은 세대 희망 출산율(1.8명) 실현을 통한 장래 인구 1억명 유지 목표는 허들이 높다. 지난해 출산율이 1.36명(한국 0.92명)으로 호전 조짐이 없다. 도쿄권 인구 전입 흐름도 되돌리지 못했다. 반면 젊은이 지방 일자리 30만개 창출, 여성 취업률 77%, 농수산물 수출 1조엔 목표에는 육박했다. 기업 본사 기능의 지방 이전 증가도 눈에 띈다. 지방창생에 대한 아베의 관심은 각별했다. 2015년 이래 연두 연설에서 그 성공 사례를 소개하고 실적을 보고해왔다.
 
지방창생과 해외 관광객 유치는 바늘과 실의 관계였다. 아베는 관광입국의 사령탑이었다. 2015년 1974만명이던 인바운드 관광객을 지난해 3100만명으로 늘렸다. 전(全)세대형 사회보장 제도도 주목거리다. 고령 인구 고용 촉진, 고령 고소득자의 의료비 자부담 강화로 연금·의료비 부담을 줄여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가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인구 동태에서 보면 오늘의 일본은 내일의 한국이다. 아베의 관련 정책은 시사점이 적잖다. 아베의 최장 총리 기록엔 시대의 난제에 맞선 낙관주의적 도전과 구상력이 한몫했을지 모른다.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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