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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의 퍼스펙티브] 의대 정원 늘려도 KTX로 서울 가는 환자 없어지지 않을 것

중앙일보 2020.09.01 00:20 종합 23면 지면보기

코로나 사태 속 의료 갈등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출입문 앞에서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확대 등 정부 의료 정책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의료 정책을 놓고 ‘강 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의료계는 의대 정원을 늘리고 공공 의대를 설립한다고 해도 병·의원의 대도시 집중을 막을 수 없는 만큼 정부의 밀어붙이기 의료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출입문 앞에서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확대 등 정부 의료 정책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의료 정책을 놓고 ‘강 대 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의료계는 의대 정원을 늘리고 공공 의대를 설립한다고 해도 병·의원의 대도시 집중을 막을 수 없는 만큼 정부의 밀어붙이기 의료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스1]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한 상황에서 정부가 의료 인력 수급 불균형을 내세워 의과대 정원 확대와 공공 의대 신설을 추진하자 의료계가 발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가 개원의를 중심으로 항거에 나섰고, 전문의 과정의 수련의들이 집단행동에 동참하고 있다. 2021년 1월 의사국가시험(국시)에 응시할 의과대 졸업 예정자 3400여 명 중 92.5%가 이번 항거에 동참해 국시의 첫 단계인 실기 시험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 시험은 1일 실시 예정이었으나 정부가 일주일 연기했다.
 

지방 의사 부족한 이유는 ‘병원 쇼핑’ 할 수 있게 한 제도 때문
의대 정원 확대하거나 공공 의대 설립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졸속적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 품질저하 불러 환자에게 피해
코로나 사태 심각한 상황서 밀어붙이기 의료 정책 중단해야

필자는 얼마 전 제자가 교수로 있는 대학병원 외래 진료실을 찾았다. 잠깐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진료실 앞에 붙은 대기 환자 명단을 보고 놀랍고 당황스러워 발걸음을 돌렸다. 대기 명단에 무려 100명의 환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심혈관 내과 같은 세심한 문진(問診)을 바탕으로 진료해야 하는 대학병원의 외래 진료실에서 말이다.
 
이런 사정은 정부의 탁상행정이 초래했다. 10여 년 전 일이다. 환자들이 예약 없이 병원에 와서 당일 진료를 받길 원하자 허용 여부를 놓고 마찰이 생겼다. 환자들은 청와대에 민원을 제기했고, 청와대는 병원 책임자에게 “환자가 원하면 당일 진료를 받도록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3시간에 100명의 환자 진료를 낳았다. 그렇게 국내 의료 환경은 속으로 곪고 퇴보해 왔다.
  
수액 단 채 KTX 타고 서울 가는 환자들
 
‘의사 끊긴 지방 병원’, ‘경북 인구당 의사 수, 서울의 절반’. 지난달 15일 신문들의 머리기사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나마 건전했던 의료전달 체계가 무너진 결과다. 의료계는 그동안 의료 혜택의 지역 편중, 의사 직종 간 편중 현상에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역대 정권은 들은 척하지 않았다.
 
2004년 경부선 KTX가 개통하자 국내 의료 체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개통 당시 부산·대구 의사들은 “환자들이 서울로, 서울로 향할 것”이라는 우려를 토해냈다. 수액을 단 채 KTX를 타고 서울로 가는 환자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를 촉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정치권이었다. 당시 정부는 그런 상황을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허가했다. 의료 혜택을 편차 없이 골고루 나누는 게 사회 정의에 부합한다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국민개보험(國民皆保險)은 국민이 모두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복지제도다. 공공성의 특성상 많은 혜택을 누리지만, 제한도 있게 마련이다. 환자가 주거 도시나 광역시·도를 넘어 진료를 받고자 할 때는 진료의뢰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권은 진료의뢰서만 있으면 환자가 전국적으로 ‘병원 사냥’ ‘병원 쇼핑’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주었다. 이러한 시스템 붕괴가 국내 의료계 불균형을 초래한 가장 큰 요인이다. 필자는 이를 전문성 없는 집단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의 결과로 본다.
 
오래전 필자가 대학병원 주임교수로 있을 때 과거 근무했던 독일 대학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독일 의사들과 일주일에 환자를 몇 명 보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필자가 한 세션(반나절 정도)에 약 30명(실제론 40~50명이었지만 줄여 말했음)의 환자를 진료한다고 말하자, “어떻게 한 세션에 환자 30명을 볼 수 있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그 대학병원에서 한 세션에 15~20명의 환자를 진료한 터였다.
 
국내 의료 품질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을 떠올릴 정도로 안타까운 실정이다. 필자가 근무하던 1970년대만 해도 독일 병원에는 6인실 병실이 존재했다. 그런데 80년대 들어 6인실은 사라지고, 기본이 1~2인실로 바뀌었다. 환자가 6인실이란 환경에서 치료받는 것을 환자 인권 차원에서 국가가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갈등 원인인 의사 증원 문제를 보자. 의과대학을 하나 설립하려면 규모가 범상치 않다. 의과대학은 기초학부와 임상학부로 구성된다. 기초학부에는 해부학·생리학·생화학·약리학·예방의학 등 10여 개 기초 학과가 있고, 임상학부에는 내과부(심장내과학과·소화기내과학과·신경과학과 등)와 외과부(심혈관외과학과·소화기외과학과·신경외과학과 등), 이비인후학과·성형외과학과·비뇨기학과·피부학과 등 40여 개 임상학과가 있다. 이들 단위를 교실(敎室·Department)이라 부른다. 의과대학 50여 개 교실에 소속된 교수진·연구진·간호사 등 인력의 수급·운영은 다른 단과대학 규모를 크게 웃돈다. 물리적 구조와 인적 구성, 예산 규모가 종합대학 설립에 버금간다.
  
의과대학 덩치는 종합대학 버금가
 
국내 한 중견 대학의 임용 교수 숫자가 이를 말해준다(2020년 자료). 그 대학의 인문사회과학대학·자연과학대학·공과대학·약학대학 등에 등재된 교수는 총 397명인데, 의과대학·간호대학·치과병원에 소속된 교수는 375명이다. 의과대학의 덩치를 가늠할 수 있다.
 
여러 상황에 비춰볼 때 이번 의료분쟁 사태는 보건복지부 측이 한발 물러서야 한다. 이유는 자명하다. 의사 증원이나 공공보건의과대학 신설 문제는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한 이후 차분히 준비하고 논의해도 늦지 않다.
 
2021년 의대 졸업 예정자의 의사국가고시 첫 단계인 실기시험 일정이 8일부터 시작된다. 이번 사태로 응시자들이 대거 불참한다면 연쇄 반응으로 내년 대형 병원의 진료 차질은 물론이고, 공중보건의와 신임 군의관 확보 측면에서도 큰 차질이 생긴다. 국가 안보 측면에서 대체할 수 없는 공백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이번 의료 분쟁에서 정부 측이 한발 물러서 주길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
 
“정부의 의사 증원 계획, 의료계 현실 외면한 것”
국내 의학 관련 188개 학술 단체를 총괄하는 대한의학회가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의과대학 신설과 의료 인력 증설에 반대하며 의료계가 벌이는 저항 운동에 동참한다는 뜻을 밝혔다. 대한의학회는 국내 40개 의과대학 교수 1만3000여 명이 속한 단체다. 전국 의과대학 교수들이 이번 의료 분쟁에 함께한다는 뜻이다. 의료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대한의학회가 의과대학 신설과 의사 증원에 반대하는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정부가 의사 인력 수요에 대한 합리적이고 세밀한 추계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의사 증원 계획은 의료 체계와 의학 교육의 원칙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결국 국민 의료비 증가와 의료의 질 저하로 이어져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
 
둘째, 의학 교육 부실화의 위험이 있다. 의학 교육은 오랜 시간이 걸리며 유능한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 과정뿐 아니라 수련교육 프로그램을 포함해 평생교육으로 완성된다. 양질의 교육을 하기 위한 기반 제도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교육의 미래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고 결정한 폐해는 후손에게 고통으로 남을 수 있다.
 
셋째, 한방 첩약을 건강보험에 포함하는 정책 결정은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다. 비대면 진료도 국민건강을 우선으로 하기보다는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으로 진행되고 있다. 보건의료 측면에서 장단점을 면밀히 평가한뒤 시행할 필요가 있다.
 
넷째, 정부는 의료 정책을 수립할 때 국민을 위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책을 수립하고, 의료계는 정책 수립·시행 과정에서 학문적인 근거에 기반해 논의하고 협력해야 한다. 일방적인 주장은 대화가 아니며 국민 건강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대한의학회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의료 정책들을 중단하고 원점에서 국가와 국민 미래를 위한 합리적 보건의료정책을 수립·시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성낙 전 가천의과학대 총장, 전 한국의·약사평론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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