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윤규 건축이 삶을 묻다] 잘 빚은 벤치·오두막 하나, 도시가 확 달라진다

중앙일보 2020.08.30 00:02 종합 23면 지면보기

21세기 젊은 작가들의 ‘작은 건축’

도시의 자투리 공간을 확용하는 ‘작은 건축’이 주목된다. 오스트리아 빈 현대미술관 광장에 들어선 ‘MQ 벤치’.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애용된다. [사진 각 건축사무소]

도시의 자투리 공간을 확용하는 ‘작은 건축’이 주목된다. 오스트리아 빈 현대미술관 광장에 들어선 ‘MQ 벤치’.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애용된다. [사진 각 건축사무소]

2004년 오스트리아 빈(Wien·비엔나) 현대미술관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랐다. 미술관도 미술관이지만 건물 앞 광장을 가득 메운 벤치가 새롭기만 했다. 사람들은 벤치에 눕거나, 얘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2001년 6월 빈 박물관지구(MQ)가 문을 연 후 현대미술관 앞 광장에는 나무 벤치 몇 개만 있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머물 공간이 거의 없었다.
 

건물 사이, 공터 활용한 임시건축
낡고 오랜 구도심에 생기 넣어줘
토론·공연 등 다양하게 쓸 수 있어
코로나19 시대, 공기정화 기능도

2002년 건축가 그룹 PPAG가 아이디어를 냈다. 미술관 방문객을 위한 다목적 가구 설계를 여러 건축가에게 맡겼다. 박물관 광장을 저택 안뜰처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덕분에 텅 빈 광장이 ‘살아있는 생활공간’으로 재탄생했다. MQ 벤치는 빈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도시의 거실’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벤치 자체가 MQ로 불리며 문화도시 빈의 홍보대사 역할을 맡게 됐다. 소규모의 임시 가구, 임시 건축임에도 도시 분위기를 바꾸는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도시는 생물체다. 숨을 쉬고 싶어한다. 건물 사이 쉼터, 작은 공원이 소중한 이유다. 점 하나, 선 하나가 그림 자체를 바꾸듯 실험적인 임시 구조물 하나가 도시의 풍경을 돌려놓는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이벤트도 열릴 수 있다. 도시에 생기가 돌게 된다. 21세기 젊은 건축가들은 바로 그 지점을 주목한다.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은 구조물’에 도전하고 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선보인 ‘신선놀음’. 국내 젊은 건축가들의 실험정신이 빛났다. [뉴시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선보인 ‘신선놀음’. 국내 젊은 건축가들의 실험정신이 빛났다. [뉴시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2014년부터 미술관 마당에 신예 건축가들이 파빌리온(천막 혹은 정자)을 짓게 했다.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시민들이 건축을 체험하고 휴식도 누릴 수 있도록 꾸몄다. 도입 첫해 ‘신선놀음’이란 작품을 시작으로 흥미로운 발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7년부터 이 프로젝트는 중단됐고, 젊은 건축가들이 꿈꿀 공간도 사라졌다. 지속성이 부족한, 관료적인 입장이 우세한 우리 문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빈·뉴욕 현대미술관의 야심찬 도전
 
뉴욕 PS1 현대미술센터 안뜰의 ‘웬디’.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나노 원단으로 만들었다. [사진 각 건축사무소]

뉴욕 PS1 현대미술센터 안뜰의 ‘웬디’.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나노 원단으로 만들었다. [사진 각 건축사무소]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의 원조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 프로젝트다. 2000년부터 세계적인 건축가를 발굴하는 플랫폼으로 계속되고 있다. 뉴욕 퀸스에 있는 PS1 현대미술센터 안뜰을 새롭게 꾸며내고 있다. 신진 건축가들은 경치·기술·공간 개념을 포괄하는 설치물을 잇달아 선보였다. 처음에는 파티를 열고 시민 놀이터 같은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건축과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때로는 사회적 메시지도 던지는 파빌리온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2012년 선보인 거대한 별 모양의 ‘웬디’ 프로젝트가 흥미로웠다. 재활용·친환경 개념을 끌어들였다. 가로·세로·높이 각 9m 크기의 대형 설치물로, 공기 중의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나노 입자 나일론 원단으로 만들었다. 승용차 260대가 배출하는 오염된 공기를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건축이 환경과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보인 철근 구조물. [사진 각 건축사무소]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보인 철근 구조물. [사진 각 건축사무소]

2000년 이라크 건축가 자하 하디드로부터 시작된 런던 하이드파크의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 프로젝트도 비슷한 계보를 잇는다. 미술관 후원금 마련을 위한 임시 천막구조물로 시작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관심과 명성을 얻으며 이후 매해 여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새로운 형태의 파빌리온을 시도하고 있다. 다니엘 리베스킨트, 렘콜하스, 알바로 시자, 헤르조그 드 뫼롱, 소 후지모토, 셀가스카노 등 현재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특히 2013년 소 후지모토는 켄싱턴 가든 나무 사이의 구름을 닮은 기하학적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350㎡  격자 구조로, 미세한 철근을 사용해 식물 생명체 같은 무성하고 투명한 형태를 이루어냈다. 인공과 자연을 융합한 모양새다. 가볍고 구름 같은 투명 구조물이 초록 정원 위에 내려앉은 것 같다. 일련의 계단식 테라스 또한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PS1 프로젝트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미술관이 주도한 건축적 실험이다. 이를 통해 작은 건축의 무한한 잠재력을 생각해본다.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건축의 본래 소임을 재차 확인한다. 작은 오브제 하나가 도시 전체 풍경을 바꾸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예향 광주의 새로운 명소 ‘광주 폴리’
 
2011년 시작한 ‘광주 폴리’ 프로젝트 중 하나인 ‘소통의 오두막’. [사진 각 건축사무소]

2011년 시작한 ‘광주 폴리’ 프로젝트 중 하나인 ‘소통의 오두막’. [사진 각 건축사무소]

2011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시작된 광주 폴리 프로젝트는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오래된 도시를 되살리는 도구로서의 폴리(Folly)를 주목했다. 폴리는 원래 과거 유럽 정원에 장식용으로 지은 조형물이었는데, 최근에는 문화·예술적 특성을 갖춘 도시재생용 건축물로 영역이 확장됐다. 스위스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가 1990년대 파리 라빌레트 공원에 선보인 35개 구조물도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낡고 늙은 구도심에 젊음의 활력을 심어주는 시도라 볼 수 있다. 예컨대 광주 곳곳에는 오두막·정자·장벽·언덕 등 각기 다른 모양의 폴리가 30개 들어서 있다. 예향(藝鄕) 광주의 면모를 되살리고 있다. 특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의 좁고 긴 땅에 세워진 미국 작가 프란시스코 사닌의 ‘광주사랑방’이 가장 인기 있는 곳 중 하나다. 이런저런 작은 모임이나 소규모 문화공연을 열 수 있고, 지나는 사람들이 편하게 쉬어갈 수도 있다.
 
광주 폴리와 비슷한 것으로 BMW 구겐하임 랩(연구소)이 있다. 전 세계 주요 도시를 옮겨 다니며 도시공동체의 미래를 그려본다. 건축·예술·디자인·과학·교육 부문의 신세대 전문가들이 두루 손을 잡았다. 뉴욕을 시작으로 2011~2016년 6년간 지구촌 9개 도시를 순회하는 구상으로 시작됐다. 일본 건축 아틀리에 바우와우가 설계했는데, 뉴욕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이스트빌리지 건물 사이의 작은 돌밭에 건물을 지었다. 극경량 소재의 탄소섬유 골조로 설계된 최초의 건물이다. 탄소섬유는 강철보다 다섯 배가량 강하다. 연구소는 모듈 방식으로 제작돼 이동이 용이하다. 뉴욕에 이어 독일 베를린, 인도 뭄바이 등으로 옮겨졌다. 임시 건축물의 모범적 사례인 셈이다. 또 지붕에 트랙을 설치해 공간 자체를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다. 사람들이 소통하고 즐기는 다목적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건축가 장윤규가 구상한 ‘에코 폴리’. 건물 옥상이나 공터 등에 공기정화 기능을 갖춘 설치물을 들여놓았다.

건축가 장윤규가 구상한 ‘에코 폴리’. 건물 옥상이나 공터 등에 공기정화 기능을 갖춘 설치물을 들여놓았다.

도시 시설물로서의 폴리는 활용 가능성이 무한하다. 도시 풍경을 넘어 도시 환경 자체를 바꾸는 폴리도 구상해본다. 이를테면 에코 폴리라 부를 수 있다. 대기오염에 대처하는 일종의 환경장치다. 요즘의 코로나19 대재앙이나 미세먼지 같은 환경재해에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건물 옥상이나 건물 사이, 혹은 공터 등 도시 유휴공간 어디에든 설치할 수 있다. 도시 환경을 정화하는 장치로서의 임시건축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성큼 다가왔다.
 
공원으로 변신한 도살장
파리 나빌레트 공원

파리 나빌레트 공원

스위스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는 프랑스 파리 나빌레트 공원에서 도시 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1993년 파리 북동쪽의 광활한 도살장을 멋진 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21세기 공원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다양한 모양의 붉은 색의 야외 조형물(사진)이 주목을 받았다. 135에이커(약 55만㎡)에 이르는 광활한 부지를 점·선·면 세 가지 요소를 이용해 예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공원으로 빚어냈다. 그림 같은 공원을 추구한 기존 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것이다.
 
추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둑판 그리드로 전체 공원을 나눈 후에 각 선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여러 모양의 빨간색 폴리를 배치했다. 폴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미래에 발생할 미지의 사건을 준비하는 ‘비워진 틀’이라는 개념이다. 개별 장소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항상 변화할 수 있다는 뜻에서다. 철학적으로는 해체주의와 맥이 통한다. 관습처럼 되풀이되는 기존 사회 시스템에 대한 거대한 질문과 같다.
 
장윤규 국민대 건축대 교수·운생동건축 대표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