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화교 문화 켜켜이 쌓인 조루…‘하이브리드 모더니티’ 유산

중앙선데이 2020.08.29 00:21 701호 27면 지면보기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광둥성의 망루형 살림집

중국 광둥성 카이핑의 리위안(立園)에 세워진 고급 조루. 조루엔 화교들의 역사와 문화가 서려 있다. [사진 윤태옥]

중국 광둥성 카이핑의 리위안(立園)에 세워진 고급 조루. 조루엔 화교들의 역사와 문화가 서려 있다. [사진 윤태옥]

바다의 역사에서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리고 돌아온 자 대부분은 연안의 백성들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화교라고 한다. 가장 많은 화교를 배출한 곳도, 화교로 가장 많이 돌아온 곳도 광둥성이다.
 

서양·중국 한데 섞인 4~5층 주택
19세기 말부터 카이핑 등지 밀집

도적떼 막으려 사격공·참호 설치
층마다 주방, 대가족·소가족 병존

조루 1800개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젠 전 세계 화교 5000만 시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광둥성 중남부에는 화교들이 독특한 망루형 살림집들을 많이 지었다. 멀리서 보면 너른 농지 한가운데 호리호리한 맵시를 드러내는 4~5층짜리 콘크리트 빌딩으로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면 구석구석 서구식 문양으로 장식된 주택이다. 서양과 중국이 한데 섞인 중서합벽(中西合壁)으로, 한 건축학자는 하이브리드 모더니티(Hybrid Modernity)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런 살림집을 조루(碉樓)라고 한다.
 
조루는 원래 망루와 같은 방어용 건축물을 뜻한다. 티베트에도 조루라는 다른 스타일의 민가건축이 있는데, 이와 구분하기 위해 카이핑 조루라고도 한다. 광둥성의 카이핑(開平)을 중심으로 허산·신후이·타이산·언핑 등 오읍(五邑)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교들이 고향에 지은 조루에는 중국 화교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단 건축만으로도 흥미롭다. 화교들이 고향으로 부친 돈 덕분에 이 지역은 부유한 편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전란이 끊이지 않던 치안부재의 시대에 도적떼들의 표적이 되곤 했고, 화교들은 이를 막기 위해 망루를 기본형으로 하는 주택을 지었던 것이다.
  
카이핑 인근 누리촌·리위안 들러볼 만
 
망루와 같은 방어용 건축물인 조루는 화교를 많이 배출한 중국 광둥성 중남부에 산재해 있다. 화교들이 고향으로 부친 돈으로 부자마을이 많았던 카이핑 등은 도적떼의 표적이 되곤 했다.

망루와 같은 방어용 건축물인 조루는 화교를 많이 배출한 중국 광둥성 중남부에 산재해 있다. 화교들이 고향으로 부친 돈으로 부자마을이 많았던 카이핑 등은 도적떼의 표적이 되곤 했다.

조루는 기능적으로는 방어가 가장 중요했다. 외벽 곳곳에 외부를 감시하면서 사격도 할 수 있는 구멍을 많이 만들었다. 일층 현관의 출입문은 견고한 이중 철문으로 만들어 총격에도 견딜 수 있게 했다. 밖에는 철판 덮개를 치고 안쪽에는 쇠창살을 설치했다. 층마다 테라스에 외부로 돌출된 연자와(燕子窩)도 만들곤 한다. 연자와는 개인용 참호와 비슷하다.
 
조루에는 문화적으로도 화교의 세태가 반영되어 있다. 전통적인 대가족과 시대변화에 따른 소가족이 병존하는 구조다. 층마다 주방이 있고 세대별로 한 층씩 사용한다. 평소에는 밥을 따로 해 먹지만 홍수가 나거나 도적떼가 출몰하면 어디서든 함께 식사할 수 있게 대비한 것이다. 화교들은 부엌을 나눴을 뿐이지 집안이 갈라진 것은 아니며(分竈不分家), 아궁이가 많으면 후손이 번성한다(多竈口多人丁旺)고 설명하기도 한다.
 
조루 안팎은 다양한 서구 양식으로 치장돼 있다. 화교들이 사진이나 그림엽서 또는 설계도를 가져와서는 고향의 향촌주택 건설자들에게 똑같이 지어 달라고 한 것이다. 눈으로만 서양 건축을 보았던 비전문가 건축주와 그런 건축물을 직접 본 적이 거의 없는 고향의 토박이 무명 건축가들이 합작하여 중국의 향촌건축과 서구건축을 융합한 것이다.
 
조루 내 부뚜막과 개인용 참호 역할을 했던 연자와. [사진 윤태옥]

조루 내 부뚜막과 개인용 참호 역할을 했던 연자와. [사진 윤태옥]

지금도 조루는 많이 남아 있다. 2007년에는 1800여 개에 달하는 카이핑의 조루와 촌락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여행객으로 조루를 찾아본다면 광저우시 서남쪽의 장먼시(江門市) 카이핑으로 가면 된다. 카이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누리촌(努力村)과 리위안(立園)을 갈 수 있다.
 
바다의 역사는 물자의 이동 역사이고 사람의 이주 역사다. 동아시아 바다에서는 15, 16세기부터 중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화교들이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 화교라는 말은 출신지와 거주지에서 의미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신중국은 자국인의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중국은 외국에 장기 거주하되 중국 국적을 보유한 자만을 화교라고 한다. 외국 국적을 취득하면 화교가 아니라 외적화인이라고 구분한다. 학술에서는 화인이란 말도 자주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혈통이 중국인이면 일괄하여 화교라고 하지만, 실제 국적은 대만도 있고 대륙도 있다. 우리와 혈통이 같은 중국 국적 동포들도 중국에서는 화교라고 구분한다.
 
중국의 화교 역사는 당송과 원명을 거쳐 아편전쟁까지, 아편전쟁 이후 신중국까지, 신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의 시기들로 나뉜다. 당송 시대에는 남중국해 연안에서 동남아 지역과의 무역이 발달하면서 해외로 나갔던 상인들 일부가 정착하는 경우가 있었다.
 
명나라는 해외도항과 사무역을 금지하는 해금(海禁)정책을 폈다가 1570년대에 이를 해제했다. 명나라 상인들은 계절풍을 따라갔다가 일부는 현지에 남았다. 현지 사정에 눈을 뜬 화교들은 다음해 다시 돌아오는 명나라 상인들의 상품을 팔아 주거나, 그들이 가져갈 물건들을 매집해 주며 화교사회로 성장해 갔다.
 
조루 내 부뚜막과 개인용 참호 역할을 했던 연자와. [사진 윤태옥]

조루 내 부뚜막과 개인용 참호 역할을 했던 연자와. [사진 윤태옥]

한편에서는 서양 각국이 동아시아 바다에서 거점항구를 확보하고 식민지 경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는 중국의 수공업품과 함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16, 17세기 대항해 대교역 시대는 중국의 수공예 인력과 일반 노동자들을 끌어당겼다. 이 시대의 이민자들은 대략 100만 이상으로 추정한다.
 
아편전쟁 이후에는 계약화공(契約華工)이 대량으로 송출됐다. 중국에서는 계속되는 궁핍과 전란이 인구를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했고, 노동력이 부족한 동남아 각 지역의 광산과 농장은 이들을 필요로 했다.
 
이들의 이주와 현지 생활을 보면 그 노고가 보통이 아니었다. 현지나 본토의 화교 거상들은 배표를 선급으로 끊어 주며 모집한 노동자들을 현지의 주석광산이나 고무나무 농장으로 보냈다. 노동자들은 합숙소에 묵으면서 임금노동을 했다. 이들을 주쯔(猪仔·팔려간 쿨리)라는 속된 말로 부르기도 했다.
 
화교 거상들은 이들의 임금에서 우선 고가의 선급 뱃삯을 공제했다. 그다음엔 합숙소의 매점에서 아편을 팔아 나머지 임금도 거의 회수해 가는 식이었다. 고향에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동남아로 이주하여 합숙소에서 하루 세끼를 배부르게 해결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에서의 고된 노동을 견디기 힘들어 아편에 기댔고 대부분 중독에 빠졌다. 쌀밥은 배부르게 먹었지만 비타민을 섭취하지 못해 각기병에 걸려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 전염병도 많았다.
  
동족 노동자 착취해 거부가 된 화교도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반대로 말하면 화교들 가운데 거부들은 배표와 깡통(주석)과 아편으로 동족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부를 쌓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일부 노동자들은 돈을 모아 귀향하거나 현지에 자리를 잡아 고향의 가족 친지들을 부르기도 했다. 이런 고난과 축재가 결합되어 순환하면서 화교 숫자는 계속 증가했다. 20세기 초에 400만~500만 수준이었고 신중국이 성립된 1949년 즈음에는 1200만~1300만에 달했다.
 
신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는 미국·캐나다·호주 등으로의 이민이 많아졌다. 친지방문이나 유학으로 가서는 눌러앉곤 했다. 2018년 전 세계 화교는 5000만을 초과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 동남아 각국이 73%로 가장 많고 남북 미주에 12% 정도이고, 그 외 유럽과 대양주 등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동남아 또는 서구까지 이주하면서 화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중서합벽의 문화를 남겼고 지금도 그 맥은 이어지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화교들이 새로운 살림집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번 기행에서 살펴본 조루인 것이다.
 
화교들이 이주한 현지에도 그들의 문화를 남기고 있다. 그 가운데 화려한 페라나칸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자기들의 스타일로 중국에 주문 제작한 고급 자기, 현란한 유리장식품, 서양에서 수집한 기물, 화려한 의상과 독특한 건축 등이다.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 페낭의 페라나칸맨션박물관이나 싱가포르의 박물관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라나칸 콜렉션을 연구한 미술사학자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이들의 독특한 고급문화를 ‘아편과 깡통의 궁전’이라는 한 구절로 축약하고 있다.
 
나는 올해 초 화교들의 이주로를 따라 페라나칸의 그곳으로 건너가려 계획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길을 막아 버렸다. 여행객으로 다른 수가 없어 훗날을 기약할 뿐이다. 이제 바다에서 내륙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첫 번째는 객가인들의 푸젠성 토루(土樓)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