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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누가 최숙현을 죽였는가

중앙일보 2020.08.27 00:31 종합 25면 지면보기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그럼 도대체 해결책이 뭐야?”
 

성적 지상주의가 근본 문제
누구나 스포츠 즐길 수 있도록
체육계 패러다임 전환해야

점심식사를 하던 도중 문화부 선배 한 분이 내게 물었다. 폭력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최숙현 선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체육계가 그럴 줄 알았어. 그 동네는 원래 구타가 일상화된 곳 아닌가. 이게 부랴부랴 법을 조금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냐고.”
 
체육계의 고질적인 폭력 문제를 없앨 방도가 있느냐는 질문에 스포츠 담당인 나는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체육계를 싸잡아 비난하는 그의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을 하기도 어려웠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선수들을 때린 사실을 무용담처럼 떠들고 다니던 지도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반전이 딱 끝났는데 말이야. 이 녀석들이 한 골 먹고 정신을 못차리더라고. 그래서 내가 주사 한 방 놔줬지. 귀싸대기 한 대씩 올려부쳤더니 후반전엔 우리 애들이 펄펄 날더라고. 역시 애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려….”
 
10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지만 그때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사회 전반에 걸쳐 ‘폭력 인지 감수성’이 제로(0)에 가까운 시기였다. 학교에선 선생님이 말 안 듣는 학생을 때렸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라.) 군대에선 선임병이 후임 병사를 때렸다. 그러니 스포츠 현장에서 지도자들이 선수들을 때린다고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성적만 좋아진다면 그깟 매 한 대 맞는 게 대수냐’고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애를 때려서라도 가르쳐 달라는 학부모도 한둘이 아니었다.
 
서소문포럼 8/27

서소문포럼 8/27

그런데 시대가 달라졌다. ‘국위선양’과 ‘성적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는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난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를 보자. 싱가포르 수영 선수 조셉 스쿨링은 2016년 8월 리우올림픽 수영 접영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싱가포르 역사상 올림픽에서 나온 첫 금이었다. 우리로 치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금메달을 딴 것과 비슷한 사건이었다. 나라가 뒤집어질 만도 한데 싱가포르는 의외로 차분했다. 물론 싱가포르 정부는 선수에게 억대의 포상금을 지급했지만, 국민들은 담담한 편이었다. 올림픽 금메달이 기쁜 일이고 축하할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국위선양과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는 게 싱가포르 국민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최숙현 선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두 달이 지났다. 정부가 부랴부랴 스포츠윤리센터를 개설했지만, 체육계의 폭력 문제가 하루 아침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해오던 스포츠비리신고센터와 대한체육회가 개설했던 클린스포츠센터의 신고 기능을 통합한 것이라지만 ‘센터’ 하나 더 만든다고 폭력이나 성폭력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신고가 아니라 금메달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성적 지상주의다. 불과 2년 전인 평창올림픽 때도 우리는 금메달 8개, 종합 4위 입상을 목표로 내걸었다. 문체부 장관과 대한체육회장이 평창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다짐하면서 목표 달성을 외쳤다. 물론 정부와 체육회의 캐치프레이즈를 고스란히 전달하면서 금메달 위주의 보도를 했던 신문과 방송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과 싱가포르의 체육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인하대 스포츠과학과 박찬민 교수에게 한국 스포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물었다. 박 교수는 이제 한국 스포츠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남녀노소가 언제든지 즐겁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는 국민에게 건강검진 하라고 지원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피트니스 코치와 함께 퍼스널 트레이닝(PT)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대줍니다. 더운 나라여서 그렇긴 하지만, 실내 피트니스 센터가 한 집 건너 하나씩 자리잡고 있습니다. 체육교사를 양성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우리는 체육 선생님이 되려면 구기도 잘해야 하고, 달리기도 잘해야 하지만 싱가포르는 기초적인 체력 테스트만 통과하면 됩니다. 대신 교사로서 필요한 교양과 전문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 스포츠는 즐기는 것일 뿐, 금메달을 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아이들을 때리면서 금메달을 따라고 가르친다. 금 8개를 따서, 세계 4위에 오르자고 부르짖는다. 누가 최숙현을 죽였는가.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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