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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시시각각] 하마터면 태극기도 당할 뻔했다

중앙일보 2020.08.25 01:07 종합 30면 지면보기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필자는 학창 시절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이는 구한말의 박영효라고 배웠다. 1882년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가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가다 선상에서 만든 게 시초였다는 것이다. 일본 도쿄해양대학 캠퍼스에 문화재로 전시돼 있던 이 배를 관람하며 잠시 감회에 젖은 적도 있다.
 

애국가 바꾸기 프로젝트는
해방 후 75년 역사에 대한 자학
교가 교체 이어 각본대로 진행

근년 들어 박영효보다 두어 달 앞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태극기가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됐고, 당시의 태극기 모습이 인쇄된 도감이 2년 전 미국에서 발견됐다. 필자는 이를 찾아낸 역사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만일 이 발견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민족반역자가 만든 태극기를 폐기하고 새로운 국기를 제정해야 한다”고 시비 거는 사람이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 믿었던 박영효는 일제 작위를 받은 친일파로 변절해 생을 마감했다. 세상이 다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아무도 태극기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민족 역사에서 태극기를 지운다는 건 한마디로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애국가를 바꿀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누가 만들었느냐와 상관없이 애국가는 이미 그 자체로 민족의 얼이 됐고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다. “누군가 조선 해안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 애국가가 합창으로 흘러나왔다. 애국가는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1945년 11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비행기 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다(장준하 『돌베개』).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것 말고는 세계 1위를 할 일이 없던 시절, 시상대의 선수는 물론 중계하는 아나운서까지 목이 메고 온 국민이 울며 하나되게 만든 노래가 애국가였다. 그뿐이던가. 5·18 광주에서 계엄군과 맞선 시민들이 가장 많이 부른 노래 역시 애국가와 아리랑이었다. 이제 와서 어떻게 애국가를 다른 노래로 대체한단 말인가. 미우나 고우나 애국가는 애국가인 것을. 지난해 1월의 여론조사에서 애국가 교체 찬성은 24.4%, 반대는 58.8%였다. 질문 서두에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에 대해 친일 행적 의혹과 독일 나치 연관설이 나오고 있다”며 은연중 찬성을 유도하는 조사였는데도 결과가 그랬다.
 
애국가 교체는 안익태 한 사람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 게 본질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지난 70여 년 역사가 정의롭지 못하다며 죄다 부정하려는 역사관이 배경에 깔려 있다. 온 국민이 지켜보고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스스럼없이 애국가 폐기를 주장한 광복회장의 기념사가 “대한민국을 광복하라”는 말로 끝난 게 그 증거다. 우리는 아직도 빛을 회복하지 못한 어둠 속에 살고 있다는 자학(自虐)이다. 문제는 그런 인식을 지닌 사람들의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애국가 바꾸기 프로젝트가 가동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본격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작사자(이은상)와 작곡가(이흥렬)가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지난해 11월 교가를 바꾼 광주일고의 사례가 그 결과를 예측하게 한다. 각지에서 교가 교체 운동을 펼친 전교조 등 좌파 진영이 가장 힘을 쏟은 곳이 광주일고였다. “항일 역사에 빛나는 광주학생운동 구심점이던 학교에서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부르는 게 말이 되느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문 사회는 둘로 쪼개졌다. 재경동문회는 새 교가를 인정하지 않고 옛 교가를 부른다. 그 속에 담긴 학창 시절의 꿈과 추억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로 동문인 이영일 전 국회의원은 “우리 교가 어디에 ‘친일’ 내용이 담겨 있느냐”며 “지금 와서 보니 애국가 교체 프로젝트의 전주곡이 아니었느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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